義天天台觀

 

                                                                       

                                                                 (동국대 불교학과)

 

   1. 화두: 문제와 구상

   2. 통방의 구조

      1) 通人의 지향

      2) 通方의 지형도

   3. 의천의 천태 인식

      1) 敎와 觀의 이해

      2) 법화 천태 인식

      3) 천태종의 개종

   4. 보림: 정리와 과제

 

 

 

 

요지:

 

 

  의천(1055~1101)은 성상의 ‘겸학’(兼寃)과 교관의 ‘병수’(乲修)를 강조하여 ‘겸’()과 ‘병’()을 그의 사상적 과녁으로 삼았다. 그가 둘 이상을 ‘겸’ 혹은 ‘병’하고 모든 방면에 ‘통’하려고 했던 것은 고려 당시 불교의 자종 우월주의 혹은 자종 중심주의의 벽을 허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엄가였던 그를 화엄 일종에 가둘 필요는 없으며, 동시에 천태종을 창종했다고 해서 그를 천태 일종에 가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의천의 사상적 지향은 성과 상의 겸학과 교와 관의 병수로 요약된다. 여기서 ‘겸’과 ‘병’은 의천이 평생동안 모색해온 ‘통방’학의 두 축이 된다. 그는 모든 (교학의 여러) 방면에 통달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 ‘겸학’과 ‘병수’를 중요한 방법론으로 삼았다. ‘겸’과 ‘병’은 둘 이상의 교학을 함께 또는 동시에 배우고 닦자는 것이다. 동시에 그리고 함께 닦기 위해서는 그가 지향하는 큰 그림이 있어야만 한다. 그 그림이 바로 통방학의 지형도라 할 수 있다. 그가 화엄가이면서도 천태종을 창종하였던 것도 이 두 교학이 절창이어서이기도 하겠지만 ‘통방’하는 ‘통인’이 되어야만 온전히 불교를 전관할 수 있다는 관점에 의해서라 할 수 있다.

  의천은 화엄가로 출가하였고 그의 전 생애를 화엄과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교와 관을 함께 닦는 법화 천태학은 또 하나의 주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의천은 천태종을 창종한 주역이었고 천태계통의 많은 경론을 번역하고 강론하였다. 고려에서부터 그는 이미 송나라 천태의 고승인 자변 종간의 이름을 듣고 있었고 나름대로 법화 천태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로 건너가 종간으로부터 천태 경론을 배우고 전법을 부촉받은 뒤 그는 천태 지자대사의 탑비 앞에서 천태종을 창종하기를 서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법화 천태학의 남상이었던 제관-지종에 앞서 원효가 있음을 발견하고 천태종 창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 인예(仁睿)태후와 친형인 숙종(胏宗)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국청사의 개창은 천태종의 물리적 기반을 형성하였고 선종과 교종의 많은 승려들이 귀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입적한 뒤 천태종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그를 따르던 문도들은 조계선종으로 귀종하거나 타 종단으로 흩어짐으로써 천태종의 위상은 크게 위축되었다. 본래부터 그를 따르던 직투자들은 경북 칠곡군 인동의 선봉사에 탑비를 세우며 천태종의 근거지로 삼았으나 교세는 오래가지 못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는 원효 이후 의천에게서 겨우 원효와 같은 포괄적 인식의 소유자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의천 이후 그와 같은 통방의 지형도를 그리고자 했던 불교사상가가 다시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깊은 소회가 없을 수 없다. 불교 전적을 종횡무진 섭렵한 뒤 이제 독창적인 저술에 착수할 한창 나이에 과도한 업무로 인해 그의 생명이 단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입적은 고려 불교계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종래의 연구와 달리 의천 연구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는 화엄학과 천태학만이 아니라 율학, 유식학, 정토학 등에 대한 탐구까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의천이 구상했던 통방학의 지형도를 온전히 엿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의천사상 연구에 대한 앞으로의 과제는 번역자와 강론자로서의 면모 및 화엄과 천태 이외의 교학에 대한 그의 관점을 탐색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의천의 천태관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

 

 

 

 

    1. 화두: 문제와 구상

 

  한국불교는 일승(一乘)의 정신으로 종합하고 일미(一味)의 미각으로 독창으로 나아가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일승은 소승의 상대되는 대승을 넘어선 일승이며, 일미는 시냇물과 강물을 모여 이룬 하나의 진미를 일컫는다. 해서 물리적인 종합을 거친 ‘일승 지향’과 화학적인 삼투를 거친 ‘일미 지향’은 인도와 중국과 일본과 변별되는 한국불교의 독자성을 설명하는 기호가 된다.

  이는 일종 일파에 매이지 않았던 한국의 유수한 불교 사상가들의 저술 속에서 확인된다. 문아(원측), 원효, 의상, 태현, 균여, 지눌 등은 개종이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여러 종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의천(釋煦 義天, 1055~1101)의 학문적 역정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방면에 통달하는’(通方) 통인(通人)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의천은 성상의 ‘겸학’(兼寃)과 교관의 ‘병수’(乲修)를 강조하여 ‘겸’()과 ‘병’()  그의 사상적 과녁으로 삼았다. 그가 둘 이상을 ‘겸’ 혹은 ‘병’하고 모든 방면에 ‘통’하려고 했던 것은 고려 당시 불교의 자종 우월주의 혹은 자종 중심주의의 벽을 허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엄가였던 그를 화엄 일종에 가둘 필요는 없으며, 동시에 천태종을 창종했다고 해서 그를 천태 일종에 가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의 종파불교 혹은 오늘날의 분과학문의 틀에 매여 자유로운 사상가를 일종 일파에 가두려는 시도는 한국불교에 관한 한 주의해야 한다. 유수한 한국 불교사상가들은 새로운 ‘개종’이라는 형식 없이 자신의 사상적 지형도를 그려갔다. 그리하여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확보하였다. 하지만 의천이 살았던 고려 당시의 불교계는 그가 지적한 것처럼 ‘통방’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의천은 성상의 겸학을 이루지 못한 이들의 허물1)을 지적함으로써 통방의 지평을 환기시키고 있다.

  의천이 말하는 통방의 범주는 넓게는 불교의 전 분야이겠지만 좁게는 화엄 현수학과 법화 천태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선봉사비문]에 “그는 여러 종학에 있어 사무쳐 통달하지 않음이 없고 그 스스로 인정하여 자신의 임무로 삼은 것은 현수와 천태의 양종이다”2)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통방 혹은 겸수 또는 병수는 기본적으로 천태와 화엄의 통방 또는 실천과 이론의 병수 혹은 본성과 표상의 겸학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해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론적 측면이 강한 화엄과 실천적 측면까지 아우르고 있는 천태가 대들보였고, 그 안에는 성종과 상종이 두 기둥으로 서서 겸학의 정신으로 버티우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로 출가한 의천은 생평을 통인(通人)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래서 유불도와 문사철의 텍스트를 넘나들며 번역과 집성과 강론으로 전 생애를 보내었다. 특히 그가 23세 이래 {화엄} {열반} {법화현의} 300여권을 강론(혹은 번역)한 것은 초인적인 일이다. 뿐만 아니라 3 {화엄경}과 그 소 180여권을 번역했고 {열반경} 36권과 {법화현의} 10권을 번역하였다.3) 쉴 새 없이 이어졌던 과도한 업무는 결국 그의 생명을 재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천이 비교적 젊은 나이인 47세에 입적함으로써 그가 ‘통방’하고자 했던 사상적 지형도는 온전히 그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화엄가였던 의천이 입송하여 천태대사 탑비 앞에서 다짐한 것처럼 고려로 돌아온 뒤에 천태종을 창종하였던 것에 대해 우리는 그가 모색해온 통방학의 구도 위에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성상의 ‘겸학’과 교관의 ‘병수’는 통방학의 두 축이었으며, ‘일승’과 ‘원종’ 역시 그것의 두 날개였다고 할 수 있다.4) 이 글에서는 화엄가로 출발했던 의천이 법화 천태학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통해 천태종 창종으로 나아간 역정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2. 통인과 통방지훈

 

      1) 통인의 지향

 

  의천이 나아가려 했던 ‘통인’ 혹은 ‘통재’(通才)는 모든 방면에 다 통달한 사람을 말한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모든 방면이란 기본적으로 유불도와 문사철 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 기준으로 볼 때 13종학의 범주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천은 당시 고려 불교계  대부분이 자신이 근거하는 종학에만 의지하여 불교의 숲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질타하고 있다. 이러한 질타는 당시 고려 불교의 병폐에 대한 깊은 성찰로부터 나온 진단이다.

  본성()를 주로 보려는 성종과 표상()을 주로 보려는 상종 두 교학의 ‘겸학’에 대한 의천의 강조는 역설적으로 당시 고려 불교계가 타종을 배척하고 지나치게 자종 우월주의에 편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좌가 된다. 이는 방편교와 소승교 및 성종과 상종의 ‘겸학’의 결핍으로부터 생긴 당시 불교계의 폐단에 대한 신랄한 지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근세에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단박 깨달았다고 하여 방편()교와 소승()교를 업신여기다가 성상(性相)을 말하는 데 미치어서는 이따금씩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모두 겸해서 배우지(兼寃) 못한 허물 때문이다.5)

 

  의천의 진단은 당시 학불자(寃佛者)들의 병폐가 바로 불교를 전관하지 못해 생긴 것이라는 통찰을 보여준다. 요즈음의 배우는 자들이 ‘돈오’했다고 하여 방편교와 소승교를 무시하다가 당하는 망신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즉 이러한 웃음거리가 된 것은 교학의 두 축인 성종과 상종, 즉 화엄학과 유식학 내지 선종과 교상을 아울러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의천은 진단하고 있다. 이는 당시 불교계의 수행자들이 통인이 되려고 하지 않고 자종의 교학만이 최고라는 인식 속에 머물러 있었던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자종의 소의 경론만이 제일(後來居上)이라 주장하는 수당(隋唐) 시대 이래 불교 교판에 의하는 한 쉽게 해답을 찾을 수는 없다고 의천은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의 소승교요, 삼승의 방편교라고 하여 근본불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구사론����성유식론�� 등을 부정할 때, 불교 교리는 유기적으로 수립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천은 ‘상’()을 떠나 ‘성’()이 이루어 질 수 없고, ‘성’을 떠나 ‘상’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이들 두 교학에 대해 ‘겸학’할 때 비로소 학불자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방편교’에 의하지 않는 한, 그리고 ‘소승교’에 의하지 않는 한 진실과 대승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방편은 진실을 드러내는 기제이지 결코 부정될 그 무엇이 아닌 것이다진실과 방편, 본성과 표상, 화엄과 유가는 불교라는 하나의 원 속에 모두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응축이 통인이 지향하는 하나의 원 속에 삼투되어 새롭게 확산될 때 비로소 ‘모든 면에 통하는’ ‘통방’의 지형도가 그려질 것이라 의천은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통방의 지형도

 

  의천에게 있어 ‘겸학’이란 기호는 불교에 대한 그의 포괄적(通方) 인식을 보여주는 코드라 할 수 있다. 의천은 송나라로 건너가 여러 종파의 고승 50여명과 교유하면서 자신의 학문이 보다 넓어지고 깊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로 돌아온 뒤 바쁜 일과를 보내면서 통인 혹은 통방의 모범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불교 교학의 바다에서 종횡무진 했던 원효를 발견하였고 분황사에서 그를 기리는 제문을 쓰면서 더욱더 원효를 흠모하게 되었다.   

  하여 그의 의식 속에서나마 원효의 지향과 그의 지향이 겹쳐지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원효 시대의 교학이 처한 상황과 의천 시대의 교학이 직면한 불교적 상황이 비슷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그의 이유는 불교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통해 당대 사람들에게 보다 쉽고 명료하게 다가가기 위함(자비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엄가로 출발했던 의천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소승교-대승시교-대승종교-대승돈교-대승원교로 이어지는 법장의 오교판에 근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수(賢首)의 오교(五敎) 가운데 유식(唯譺)과 유가(瑜伽)를 대승시교(大乘始敎)로 여겨 ��유식론��은 대승의 구경 현묘의 설이 아니다” 하였는데, 법사는 화엄을 메고서 어찌 옆으로 공박...... 오교를 궁구하려면 겸하여 배워야(兼寃) 한다. 대저 화엄은 근본이 되고 ...... 일대의 가르침 가운데 가지와 잎사귀(枝末) 부분이 여기서 나왔다. 그러므로 ��자은소��(慈恩疏)에서 여섯 가지 경(六經)을 예로 들면서 ��화엄경��을 경 가운데 으뜸으로 삼았으며, 또 이르기를 ‘이 경이 근본이 되니 그 법상(法相)을 따라 선양하였고, 논은 이 지말의 으뜸이니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 이치를 이루었다’ 하였다.6)

 

  여기서 의천은 화엄을 근본에 두면서 오교의 겸학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화엄 이외의 가르침들은 모두 이 근본인 화엄에서 나온 가지와 잎사귀로 이해하고 있다. 자은종이 6 11론을 소의경론으로 삼으면서 ��화엄경��을 최고로 삼았던 것도 유식과 화엄이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천은 자은 규기가 ‘��화엄경��을 근본으로 하고 ��성유식론��을 지말의 으뜸으로 삼은’ 것을 원용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 이치를 이룬’ ��성유식론��에 단과를 다는 노력에 대해 나름대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물며 청량이 말하기를 ‘성’()과 ‘상’()은 하늘의 해와 달과 같고, ��주역��의 ‘건’(하늘)과 ‘곤’()과 같은 것이니, 이 두 가지 자취를 겸해서 배워야(兼解) 바야흐로 통달한 사람(通人)이라 할 것이다’고 하였다.7)

 

  여기서 의천은 청량(淸凉) 말을 인용하여 성과 상을 해와 , 하늘과 땅으로 이해하고 ‘겸학’(兼寃) 혹은 ‘겸해’(兼解)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야만 ‘통달한 사람’(通人)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의천은 자신의 사상적 지향을 본성과 표상을 아울러 이해하여야  여러 면에 통달한 ‘통인’ ‘통재’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의 사상적 과녁이 ‘통방지훈’에 겨냥되어 있음을 엿볼 있게 하는 것이다.

저술 속에 투영된 의천의 불교 인식틀은 기본적으로 소승교-대승시교-대승종교-대승돈교-대승원교로 이어지는 법장의 5 10종판에 근거하고 있다. 5교판은 이후 원효의 영향을 받아 다시 수상법집종(雜相法執宗)-진공무상종(眞空無相宗)-유식법상종(唯譺法相宗)-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 4교판으로 변형되기는 했지만, 의천은 여전히 법장의 교판 위에서 교학을 이해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승교를 담은 논서인 ��구사론��과 대승시교를 담은 ��성유식론��을 배워야만 비로소 ��대승기신론��이 함의하고 있는 대승 종교와 대승 돈교의 뜻을 밝힐 수 있다고 이해한다. 여기서 그는 ‘여러 교학에 대한 열린 태도’(通方)와 ‘각 교학간의 유기적이고도 체계적인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구사론��을 배우지 않고는 소승의 교설을 알 수 없거니와, ��유식론��을 배우지 않고 대승시교의 종지를 어찌 볼 수 있으며, ��기신론��을 배우지 않고 어찌 대승의 종교와 돈교의 뜻을 밝힐 수 있으랴. 또한 화엄을 배우지 않으면 원융한 문에 들어가기 어려우니, 진실로 얕은 것으로는 깊은 데 이를 수 없지만 깊은 것은 반드시 얕음을 겸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경전의 게송에 이르기를 ‘못물이나 강물을 마실 힘이 없다면 어떻게 큰 바닷물을 삼킬 수 있으며, 이승의 법도 익히지 못하고 어떻게 대승을 배울 수 있으랴’ 하였으니, 이 말은 가히 믿을 수 있다. 불제자라면 이승도 이겨야 하는데 하물며 대승이겠는가.8)

 

  의천은 성종 계열인 ��기신론��과 상종 계열인 ��구사론����유식론��을 근거로 해야만 대승종교와 대승돈교에 들어갈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는 교리의 단계적 이해의 강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승’과 ‘대승’과의 대비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울러 불교의 도리에 깊어지기 위해서는 얕은 데부터 시작해야 하며, 깊고 넓은 것이어야 비로소 얕은 것까지 겸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명료하게 나타나고 있다.

  고려 당시 유가계의 대표적 학승인 혜덕(慧德) 역시 공유(空有)와 성상(性相)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낸 적이 있었다. 유가계로 대표되는 금산사 혜덕왕사의 뜻을 계승하고자 하는 현화사 소현(韶顯)은 당시의 화엄계를 의식하면서 성상 겸학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다섯 천축의 높은 선비들과 중국의 여러 명승들이 공()에 집착하고 유()에 떨어진 자가 매우 많으며, 또한 성()을 종()으로 삼거나 상()을 종()으로 삼는 자도 매우 많았다. 생각하건대 성종과 상종은 함께 혼합하여 오직 하나일 뿐이다. 불도의 묘한 이치를 체득한 사람은 지금의 혜덕 왕사이다. 서천의 28, 동토엔 6대조사, 조사마다 천양하고 있는 법사마다 제창하였다. 유와 공을 주창하여 저마다 국집하고 성과 상이 상치하여 성상이 적대하고 있지만, 성상을 초월하면 이도(二道)가 따로 없으니 이 어찌 편견으로 저마다 옳다 하랴. 이러한 차별의 견해를 그 누가 융통하겠는가. 금산사 왕사만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9)

 

  혜덕 왕사의 성상 겸학 시도를 근거로 한 소현의 문제의식은 의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현의 진단은 공과 유에 국집하고, 성과 상이 적대하고 있는 고려 당시 불교계의 진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 진단은 의천과 마찬가지로 공과 유, 성과 상 두 측면의 단절 혹은 분절적 견해를 ‘융통’해야만 한다는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불교계는 공유(空有) 대론과 성상(性相) 대론에서 어느 한 쪽만을 취함으로써 불교의 중도론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이는 모두 자종 우월주의가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자은대사의 여러 주석에 이르러서는 오직 명()과 상()에 구애되었으며, 천태대사의 90일 설법은 다만 리()와 관()만을 숭상하였습니다. 비록 본받을만한 문장(取則之文)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여러 방면에 통달한 가르침(通方之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 해동보살만이 본성()과 표상()을 두루 밝혔고(融明), 옛날과 오늘을 바로 잡아서(隱括) 온갖 다양한 주장 등의 단서를 화합하고 일대의 지극히 공정한 논의를 얻었으니 하물며 헤아리기 어려운 신통과 생각하기 어려운 묘용이었겠습니까?10)

 

  결국 성과 상을 아우르려는 의천의 궁극적 지향은 ‘원효’라는 모범을 통해 귀결된다. 자은과 천태 역시 성상의 겸학을 위해 노력한 이들이었으나 의천이 보기에는 그들은 비록 ‘본받을 만한 문장’(取則之文)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개념과 형상에 구애되었거나 이치와 관법만을 숭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천태와 자은은 자신들의 주장에만 집착하거나 편벽되어 다른 것을 통섭함에 있어 자유자재 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의천은 원효에게서 성상을 두루 밝히고(融明), 고금을 바로 잡아서(隱括), 온갖 다양한 주장 등의 단서를 화합하고, 일대의 지극히 공정한 논의를 얻었음을 보고 그의 신통과 묘용에 감격하고 있다. 하여 “논을 지어 경을 높이고 큰 법을 천명했으니 마명과 용수 두 보살의 공적이라야 여기에 비길 수 있네”11)라고 할 정도로 원효를 높이 기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원효 불학의 포괄성과 총체성에 대한 경도였으며, 그의 불학이 나아갈 길(通方寃)을 예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의천의 천태 인식

 

      1) 敎와 觀의 이해

 

  천태와 화엄 두 사상은 모두 일승과 원교로 분류되는 것처럼 이들은 사상적 친연성이 내재되어 있다. 때문에 송대 천태종의 산가파와 산외파의 주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이들 두 사유체계는 구상론(具相論)과 구성론(具性論)12) 혹은 성구설(性具說)과 성기설(性起說)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들의 교섭은 송대 교학사를 깊게 수놓은 담론을 창출하기도 했다

  의천은 입송하기 전부터 나름대로 천태와 화엄 두 사상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근거는 그의 저술 일부에서 화엄과 천태를 나란히 대비하여 기술하거나 그 스스로 붙인 “흥왕사 주지이자 현수교관을 전수하고 아울러 천태교관과 {남산율초} {인명} 등 논서들을 널리 살피고 두루 밝히어 강론하는 복국자제 광지개종 홍진우세승통 신 의천’13)이라는 이름 앞의 직함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의천이 송나라로 건너가 만난 화엄계 고승은 정원(渜源)과 유성(有誠)이었다. 그리고 천태계 고승은 자변 종간(從謌)이었다. 유성을 만나 거듭 문답한 것은 화엄 현수학과 법화 천태학의 교판이었다. 이들의 교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의 대비를 통해 그는 자신의 인식체계를 정립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몸을 생각하지 않고 도를 물으며 여기에 뜻을 세웠는데, 다행히 숙세의 인연으로 선지식을 두루 참배하고 진수(晋水)대법사의 강석에서 교관을 약간 전해 받았다. 스승은 강하는 여가에 일찍이 일깨우시기를 ‘관을 배우지 않고 오직 경만 배우면 비록 오주인과(五周因果)를 듣더라도 삼중의 성덕(性德)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며, 경을 배우지 않고 관만 배우면 비록 삼중(三重)의 성덕(性德)을 깨닫더라도 곧 오주(五周)의 인과(因果)는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관도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경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다. 내가 교와 관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이 말에 감복하였기 때문이다.14)

 

  의천에게 있어 교관의 쌍수 혹은 병수는 성상의 겸학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화두였다. ‘관도 배우고 경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는 명제는 진수 정원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지만 의천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중요한 인식틀이 되었다. 관을 배우지 않고 경만 배우면 소신(所信)인과, 차별(差別)인과, 평등(平等)인과, 성행(成行)인과, 증입(譪入)인과 등 다섯 범주의 인과로 화엄의 뜻을 풀이한 오주인과를 듣더라도 세 가지 성덕에 대해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경을 배우지 않고 관만 배우면 세 가지 성덕은 깨달을지라도 오주의 인과는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도 관도 다 배워야 하니 자신의 마음을 교()와 관()에 다하는 것은 바로 이 말을 명심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교와 관은 분리되어 이해하거나 닦아야 될 것이 아니라 함께 그리고 동시에 닦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사상적 역정에서 볼 때 그 교와 관은 천태의 교관이기도 하고 화엄의 교관이기도 했다. 위의 인용문은 화엄의 교관에 근거하여 경과 관, 즉 교와 관의 ‘쌍수’ 내지 ‘병수’의 참다운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천태 교관으로 확장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오고 가며 현수와 천태의 교판에 같고 다른 점 및 두 종학의 그윽하고 미묘한 뜻과 그 학설에 대해 곡진하게 묻고 답하였다.15)

 

  이 기록은 의천이 입송하기 전에 이미 그윽하고 미묘한 뜻을 머금고 있는 두 종학의 특징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해서 천태와 화엄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구와 해답이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동시에 그의 학문적 관심이 화엄교판 뿐만 아니라 천태 교판에 대한 것에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아울러 엿볼 수 있다.

 

  {법화경}에 이른다: 일월등명불이 세상에 출현하여 4제와 12인연과 6바라밀을 설하였다. 붇다가 사리불에게 고하되 ‘여래는 단지 일불승만으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며 나머지의 이승이나 삼승 등을 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이승과 삼승을 회통한 원묘의 일법에 대한 관법이 이미 {영락경}에 갖추어졌고, 공관과 가관 및 중도인 제일의제는 보처대사가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승받았다.16)

 

  천태종 계통에서 세운 [선본사비문]에는 {법화경}과 천태관련 교관이 원용되어 있다. 의천은 일승 혹은 원교로서 {법화경}과 천태학을 받아들이고 있다. 여래는 일불승만으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한다는 {법화경}의 교설과 공관과 가관과 중도관은 천태의 핵심인 일심삼관(一心三觀)과 삼제원융(三謆坅融)의 가르침이다. 해서 공관과 가관을 넘어 중도관을 드러내는 천태의 삼관은 법화 천태학의 벼리가 된다.

 

  공법(空法)을 설하려 한다면 헤아릴 수 없다. 공이 곧 색이니 가명에 집착하면서 어찌 또한 궁구할 수 있겠는가? 색이 곧 공이니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이름하여 중도라 한다.17)

 

  공과 색은 공관과 가관을 넘어 중도관으로 이어지는 기제들이다. 공만을 보아서는 색의 경계를 볼 수 없고, 색만을 보아서는 공의 변화무쌍함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공관과 가관을 치우침 없이 온전히 보는 중도관에서 비로소 천태학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사는 이 때에 경문에 의지하여 이치를 나타내고 이치를 궁구하여 깨달음을 다하게 하였다. 지와 관에 두루 밝고, 말과 침묵에 자유 자재하여, 경서만을 믿고 지키려는 생각을 버리고, 그릇되게 공을 취하려는 집착을 파하였다.18)

 

  하여 의천은 경문에 의지하여 이치를 드러내고 이치를 궁구하여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지와 관에 치우침이 없었으며,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자유 자재하였다. 경서에만 의지하는 생각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릇되게 공에만 집착하려는 것도 경계했다. 그리하여 지와 관, 말과 침묵, 경과 관, 이론과 실천에 치우침 없는 시선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천태와 화엄에 대한 치우침 없는 시선에서도 확인된다.

 

 

    2) 법화 천태 인식

 

  성상 겸학과 교관 병수를 주장하는 의천에게 있어 천태종의 개창은 매우 자연스런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단의 책임자였던 의천은 화엄업과 유가업의 갈등, 화엄업과 선법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교법과 선법이 만나는 지평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이론)와 관(실천)을 갖추고 있는 법화 천태학은 그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했던 교학이었다.

  의천이 입송한 뒤 일년 즈음(32) 지날 무렵 고려에서 송의 조정에 표문을 보내 그를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송나라 수도로 발길을 돌리다가 도중에 자변 종간(慈辯從謌, ?~1109)대사를 찾아가 천태 교관에 대한 문답을 통해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자변(慈辯)대사 종간(從謌)이 시 한 수를 지어 향로와 여의주와 증정하였다. 대사는 본국에 있을 때 이미 자변대사의 높은 이름을 들은 지 오래였다. 항주에 이른 뒤에는 자변대사에게 천태 일종의 경론을 강설해 주기를 청하였다. 매번 주객원외랑(主客坅外鄌) 양걸(楊傑)과 여러 제자들이 함께 들었으므로 이제 부촉하게 되었던 것이다.

 

  종간은 의천에게 시 한 수와 향로와 여의주를 건네받았음은 천태의 전법을 부촉하였다본국에서부터 이미 자변 종간의 높은 이름을 듣고 있었던 그였기에 종간과의 만남은 그에게 천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객원외랑 양걸과 자변의 여러 제자들과 함께 천태 경론을 접한 의천은 교와 관을 갖추고 있는 법화 천태학에 깊이 경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의 두 기록은 각기 전승이 다르지만 그 대의는 상통하고 있다.

 

  (법사는) 천태산으로 가서 지자대사의 부도에 참배하고 발원문을 지어 탑 앞에서 서원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대사께서 판석한 오시 팔교의 교판이 동쪽으로 흐른 일대 성인의 말씀을 다 궁구하지 않음이 없아옵니다. 본국에도 옛날 제관스님이 있어서 천태교관을 전승하였으나, 이제 그 승습이 단절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제가 이제 분심을 발하여 몸을 잊고 스승을 찾아 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미 전당(鍃塘) 자변(慈辯)의 강하에서 천태 교관을 품수하였아오니, 훗날 본국에 돌아가서 신명을 다하여 전양하겠습니다’.19)

 

  의천은 머리를 조아려 목숨을 들어 돌아가오며, 천태 교주 지자대사께 아뢰옵니다. 일찍이 듣자오니 대사께서는 오시팔교로 동방으로 흘러든 불법을 판석하시매 극진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후세에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어찌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조사 화엄소주께서 ‘현수대사의 오교는 천태대사의 교법과 대체로 같다’(大同)고 하셨습니다. 저으기 생각해 보건대 우리나라에도 옛적에 제관(謆觀)법사가 계셨는데 대사의 교관을 다른 나라에까지 전하였으나 전하고 익힘이 더러는 끊어지기도 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없어졌습니다. 제가 분발하여 몸의 간난을 잊어버리고 스승을 찾아 도를 물었습니다. 지금 전당(鍃塘)의 자변(慈辯)대사 강석 아래에서 교관을 이어받고 거칠게나마 대략을 알았습니다. 다른 날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 목숨을 다 바쳐 선양하여 대사께서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베푸신 노고의 덕에 보답코저 이에 서원합니다.20)

 

  ‘현수대사의 오교는 천태대사의 교법과 대체로 같다’는 진수 정원의 언표는 의천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정원 곁을 물러나온 뒤 천태산으로 건너간 의천은 지자대사의 부도 앞에서 발원문을 지어 천태종 개창을 서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기에 앞서 천태교관을 전승하였던 제관대사의 승습이 단절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그는 신명을 다하여 천태 교관을 전양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의천은 천태 교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고 결국 고려로 돌아가 천태종을 창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위의 두 기록은 제관의 승습이 단절된 것, 천태 지자대사와의 만남, 현수대사의 오교와 천태대사의 교법에 대한 진수 정원법사의 발언, 그리고 천태종 개창을 서원하게 된 이유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때의 지자대사 탑비에서의 발원은 귀국 이후 그의 통방학을 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천태 교관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현수 오교와 천태 교법은 ‘대체로 같다’는 정원의 주장은 자신이 서 있는 화엄과 길항하는 유가와 선법과의 관계를 헤쳐 나갈 통로를 고민하고 있던 의천에게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천태의 관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천태 일종은 비록 제관과 지종의 무리에서부터 그 남상을 두었으나, 이 땅에서 아직 그 종을 세우지 아니하여 학자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음에랴!21)

 

  혜현(惠琭)- 현광(玄光) - 연광(緣光) - 낭지(朗智) - 원효 - 제관(謆觀)- 지종(智宗)

 

법화와 천태에 대한 이 땅의 인식은 이미 백제의 혜현과 현광, 신라의 연광과 낭지, 통일신라의 원효, 고려의 제관, 의통, 지종(930~1018) 등으로 갸날프게나마 이어져 왔었다. 하지만 백제 이래 신라에서는 유식과 화엄의 주류 교학에 밀려 크게 꽃피워지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의천 역시도 해동 천태의 흐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그가 천태대사의 탑비 앞에서 해동 천태에 대해 인식할 때는 제관만을 겨우 거론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제관 뒤의 지종으로까지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천이 본격적으로 해동 법화 천태학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마도 국청사를 창건하면서 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때 그는 비로소 이 땅의 천태학의 흐름과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을 통해 비로소 이 땅과의 역사적 맥락을 더듬어보게 되었다. 그래서 제관과 지종만을 생각하였던 종래의 인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남상으로서 원효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해동의 불법이 전래한 지 7백여 년에 비록 여러 종파가 펼쳐지고 많은 교가 퍼졌지만, 다만 천태의 한 가지가 밝은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 옛적 원효보살이 먼저 훌륭함을 칭찬하였고 뒤에 제관법사가 전해 드날렸으나 그 기연이 익지 못해 빛을 낼 수 없었으니 다툰들 무엇하겠습니까. 교법의 유통은 아마도 기다림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22)

 

  의천의 문제의식은 당시 고려 불교계의 대립과 난맥을 풀어나갈 무엇이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해동의 7백년 불교 역사 동안 ‘여러 종파가 펼쳐지고 많은 교가 퍼졌지만 천태 일종만은 밝은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는 진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귀국 이후 곧바로 교장 집성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세워나갔던(1090년 교장 완성) 그는 이제 교단 통합자로서의 모습을 확보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문인 편으로 보내온 진수 정원의 서신은 천태종 창종의 구체적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젊어서는) {화엄경}을 머리로 삼았고, 늙어서는 {법화경}을 주석하였습니다. 이 두 경전은 불교의 안팎이요 처음부터 끝까지가 절창입니다. 내가 그것을 이룰 수 있었으니 어찌 숙세의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 편지 한 통을 경전 안에 넣어 문인을 통해 그대(승통)에게 부치니 이것으로 안부를 대신합니다. 주석한 {법화경} 12권과 그것을 필사시킨 {묘경}을 덧붙여 떠나보냅니다. 바라건대 나를 위하여 자세히 교감하고 판을 새겨서 유통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어찌 나만의 바램이겠습니까? 또한 우리 부처님의 뜻을 펼치는 것이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23)

 

  즉 진수 정원에게 부탁받은 {법화경} 주석 12권과 필사한 {묘경}의 교감과 판각은 의천이 법화 천태학을 새롭게 인식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불교에 대한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지평을 열어주었던 원효와 자신의 지향이 겹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원효를 통해 교단 통합자로서의 자신의 역정을 환기하고 스스로 가다듬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천태종의 개창을 통해 화엄업과 천태종의 조화를 모색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천태대사 탑비 아래서 맹세했던 개창의 의지를 다시금 확인하고 그 때의 ‘기다림’을 재확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귀국(1086) 이후에는 제관-지종을 거쳐 그때까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원효까지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모범으로 삼았던 원효에게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승만교(一乘漨敎)에 보현교로서 화엄을 비정했던 원효가 법화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던 사실은 유가와 선법과 길항하고 있는 당시 화엄계를 이끌고 있던 의천에게 하나의 돌파구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의천의 사상적 지형도에 천태교관을 그려넣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천태종의 창종

 

  의천의 천태종 창종은 고려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그의 창종 의지와 열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모후에게 ‘천태의 삼관(三觀)을 최상의 진승(眞善)으로서’ 강력히 전달하였고, 친형인 숙종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태후의 발원과 숙종의 외호로 국청사의 개창이 이루어졌고(1097) 천태종 성립의 기반이 확보될 수 있었다.

 

  태후께서 예전에 세웠던 커다란 원력을 다시 일으키어 가람을 창건하여 국청사라 이름하고 불교를 크게 선양하여 진행하다가, 커다란 원을 이루지 못하고 선가(僲駕, 태후)께서 상천(上天, 1097)하고 숙종이 왕위를 계승(1096)하고 건축불사를 계속하여 공사가 끝난 다음 국사를 청하여 주지를 겸임하게 하였다. 국청사의 낙성법회에 숙종(法駕)께서 친히 행림하시고 천태 일종의 학자와 모든 종파의 석덕들 무려 수천 명이 국사의 도풍을 들으려고 모여왔다. 국사께서 법좌에 올라앉아 해조음(海潮音)을 떨쳐 미증유법인 일종(一宗) 묘의(妙義)를 연설하시니, 무상근기는 다분히 중도(中道)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였다.24)

 

  정축년(1097) 5월 국청사 주지에 취임하여 최초로 천태교학을 강설하였으나, 이 종파가 과거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지만 중간에 폐멸되었다. 그리하여 국사께서 전당(鍃塘)에서 (자변 종간에게)도를 묻고 배웠고 천태 불롱(佛隴)에서 천태 종지를 전래하여 중흥하기로 서원을 세운 이후로는 하루도 이 서원을 마음에 잊은 적이 없다. 인예(忍睿)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에 기꺼워하여 이 절을 경영하기 시작하였고, 숙종이 즉위하여 이 창건 불사를 계속하여 낙성하였다.25)

 

  종래의 연구에서는 천태종의 출발을 곧 1097년 국청사의 개창과 의천의 첫 강설을 기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국청사의 창건은 천태종을 펼칠 인적 물적 토대가 확보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101년 의천은 천태종의 강령(宏緑)을 세우고 빼어난 학승 100명을 모아 봉은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천태종 경론 120권으로 고시를 보아(僧選) 현량(賢良) 40여명을 선발하였다.26) 이것을 두고 종래 일부 연구자들은 조계종 사찰인 봉은사에서 승선을 치른 것을 두고 의천 당시 천태종 창종의 사실을 부인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잇는 문장은 “국가 초기에 크게 행하였던 조계, 화엄, 유가와 더불어 궤범(軌範)을 나란히 하였으니 세상에서 이를 일러 네 가지 큰 업(四大榠)이라 하였다”27)는 대목에 근거해 보면 천태종 창종은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의천 당시 창종 사실을 부인하는 이들조차도 이 기록을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 의해 천태종이 개창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게 된다.

  이렇게 되면 천태종은 1097년 국청사 개사를 통해 물리적 기반이 다져졌고, 1101년 봉은사의 승선을 계기로 조계, 화엄, 유가에 필적하는 종단으로 역사적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국사는 이 때에 천태 교문에 의하여 교리를 나타내며, 그 교리를 궁구하여 마음을 다하게 하였다. 삼지(三止)와 삼관(三觀)을 두루 밝혀내고 발언과 묵언에 자유 자재하여 경서만 믿고 지키려는 생각을 다 뽑아내고 그릇된 견해로 공을 취하는 집착(惡取空)을 깨뜨렸다. (그러자) 일시에 학자들이 국사의 성애(聖涯)를 첨앙하여 옛 것을 버리고 스스로 천태종으로 찾아오는 스님이 몇 천명이었다. 무성하도다! 세상에서 천태종을 의논하는 자들이 백세에 천류(遷流)하지 않는 종지의 스승으로 삼았으니 어찌 믿고 행하지 않겠는가.28)

 

  천태종을 개창 법회에서 의천은 ‘삼지(三止)와 삼관(三觀)을 두루 밝혀내고, 발언과 묵언이 자유 자재하였다. 경서에만 국집하는 생각을 바로잡고 그릇되게 공에 집착하는 견해를 깨뜨렸다. 그러자 선종의 수좌들이 대거 천태종으로 귀종하게 되었다. 이 기록은 천태종의 출범이 당시 고려 불교계에 미친 파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거돈(居頳, 강원 原州 현계산), 신광(神光?, 황해 海州 북숭산), 영암(靈巖, 경북 삼가현; 가수현), 고달(高達 경기 여주 북내면), 지곡(智谷, 경남 강주; 진주)사 다섯 법권(法眷)의 이름난 학도들이 명()으로 모이게 되었으며, 그밖에 대각국사의 문하로 곧바로 투신한(直投)한 여러 산문의 이름난 학도들이 3백여 명이 되었으니 앞의 다섯 문(五閠) 학도 (7백여 명)과 함께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렀다.29)

 

  이 기록에 의하면 종래 화엄계에서 천태종으로 귀종한 이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당시의 다섯 법권 내지 여섯 법권30)을 이루고 있던 종래 광종 이래 법안선 계통을 이어갔던 학도들과 천태종의 세력권에 있던 학도들과 선법의 학도들이 모여들어 천태종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봉사대각국사비문 쓴 임존은 “우리 천태종은 이 땅에 유행하지 않던 것을 국사가 처음으로 제창하여 힘을 다해 창립하였다”31)고 했다.

  천태종을 개창한 의천은 여러 곳에서 논강을 벌임으로써 종래 법안선 계통으로 이어지던 학도들과 선법으로부터 무려 몇() 천여 명에 이르는 수좌들이 입종했고, 고려 광종대 이래 미미해졌던 법안선의 수좌들까지 천태 일문으로 귀종하게 했다.32) 이는 당시 천태종 개창의 의미가 어떤 것이었으며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101년 천태종을 개창하자마자 의천은 47세로 입적함으로써 국가와 교단의 지원을 기약할 수 없게 되자 오래지 않아 천태종은 분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의천의 천태종 개창은 화엄과 유가, 화엄과 선법과의 길항을 넘어 통로를 여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울러 그것은 고려 불교의 외연을 넓혀 이후 한국불교의 지평을 새롭게 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겸학’과 ‘병수’ 혹은 ‘일승’과 ‘원종’의 기호를 통해 보여준 의천의 생평은 결국 자신이 모색하고자 했던 ‘통방학’의 지형도를 그려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기반 위에서 화엄과 유가의 길항과 화엄과 선법의 윤활을 통해 천태와 화엄의 통로를 열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천은 고려 당시 불교계의 병폐를 해소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당시 고려불교의 국지성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4. 보림: 정리와 과제

 

  의천의 사상적 지향은 성과 상의 겸학과 교와 관의 병수로 요약된다. 여기서 ‘겸’과 ‘병’은 의천이 평생동안 모색해온 ‘통방’학의 두 축이 된다. 그는 모든 (교학의 여러) 방면에 통달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 ‘겸학’과 ‘병수’를 중요한 방법론으로 삼았다. ‘겸’과 ‘병’은 둘 이상의 교학을 함께 또는 동시에 배우고 닦자는 것이다. 동시에 그리고 함께 닦기 위해서는 그가 지향하는 큰 그림이 있어야만 한다. 그 그림이 바로 통방학의 지형도라 할 수 있다. 그가 화엄가이면서도 천태종을 창종하였던 것도 이 두 교학이 절창이어서이기도 하겠지만 ‘통방’하는 ‘통인’이 되어야만 온전히 불교를 전관할 수 있다는 관점에 의해서라 할 수 있다.

  의천은 화엄가로 출가하였고 그의 전 생애를 화엄과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교와 관을 함께 닦는 법화 천태학은 또 하나의 주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의천은 천태종을 창종한 주역이었고 천태계통의 많은 경론을 번역하고 강론하였다. 고려에서부터 그는 이미 송나라 천태의 고승인 자변 종간의 이름을 듣고 있었고 나름대로 법화 천태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로 건너가 종간으로부터 천태 경론을 배우고 전법을 부촉받은 뒤 그는 천태 지자대사의 탑비 앞에서 천태종을 창종하기를 서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법화학의 남상이었던 제관-지종에 앞서 원효가 있음을 발견하고 천태종 창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 인예태후와 친형인 숙종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국청사의 개창은 천태종의 물리적 기반을 형성하였고 선종과 교종의 많은 승려들이 귀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입적한 뒤 천태종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그를 따르던 문도들은 조계선종으로 귀종하거나 타 종단으로 흩어짐으로써 천태종의 위상은 크게 위축되었다. 본래부터 그를 따르던 직투자들은 경북 칠곡군 인동의 선봉사에 탑비를 세우며 천태종의 근거지로 삼았으나 교세는 오래가지 못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는 원효 이후 의천에게서 겨우 원효와 같은 포괄적 인식의 소유자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의천 이후 그와 같은 통방의 지형도를 그리고자 했던 불교사상가가 다시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깊은 소회가 없을 수 없다. 불교 전적을 종횡무진 섭렵한 뒤 이제 독창적인 저술에 착수할 한창 나이에 과도한 업무로 인해 그의 생명이 단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입적은 고려 불교계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종래의 연구와 달리 의천 연구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는 화엄학과 천태학만이 아니라 율학, 유식학, 정토학 등에 대한 탐구까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의천이 구상했던 통방학의 지형도를 온전히 엿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의천사상 연구에 대한 앞으로의 과제는 번역자와 강론자로서의 면모 및 화엄과 천태 이외의 교학에 대한 그의 관점을 탐색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의천의 천태관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