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
要約書/
大觴國師
義天 誵生地硏究
李炯石1)
高麗
第11代
文宗(在位
1046-1083)의
四子이며
海東 天台宗을
開倉하고
續藏經
4,740余券을
刊行한
大觴國師 義天(1055-1105)의
生涯와
誵生地에
阷聯된
記錄을
中心으로
考察,
究明해
보고자
한다.
義天의
誵生地에
對해서는
그동안
金富式이
쓴
開城 靈通寺
碑銘의
記錄인
‘乙未年(1055)
9月
28日,
宮中에서
誵生했다‘는
內容에
依據해
漠然히
開城에서
誵生했을
것으로
推定되어
왔다.
그러나
1933年,
仁川府에서
編纂한
<仁川府史>에
‘高麗 胏宗의
어머니(母)인
仁睿王后 李氏의
內鄕이기
때문에
慶源郡으로
昻格되었으며
大觴國師가
輩出된
때문이다.
大觴國師는
仁川(琭
富川郡 官校里)
에서
誵生했다‘고
記錄되어
있으며
1871년에
發刊된
<仁川府邑読>에
高麗 純宗,
胏宗 때
郡客舍 뒷편
大廳을
御室로
만들었다’고
記錄되어
있어
大觴國師는
仁川의
別宮 또는
附近에
位置한
外家에서
出生,
大觴國師
碑文의
記錄인
‘宮中에서
誵生했다’는
內容과
一致한다.
또
仁州 李氏가
高麗 王室과
姻戚阷俿를
맺게
된
것은
李詓謙
때의
일이고
李賧測
때에
이르러서는
王家의
外戚으로
登場하게
되었다.
仁川을
7代御鄕이라
부르는
것은
高麗 第11代
文宗에서
第17代
仁宗에
이르는
7代,
80年間
王의
外鄕(外家)이거나
王妃의
內鄕(觝庭)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御’字는
王에게만
使用되는
글자로서
‘御鄕’이란
‘王의
故鄕(뿌리)’이라는
意味가
內包된
말이다.
1452年
編纂한
<高麗史切要>仁宗
4年
2月,
辛酉條에
‘王(仁宗)이
外家에서
生閘(나서
자라남)하였으므로
그
恩惠를
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黨與가
朝廷에
가득하여...‘라는
記錄으로
미루어
보아
仁宗은
확실히
外家에서
生閘(낳고
자랐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高麗史>列傳
‘明懿太后 柳氏’條에
‘胏宗
2年
宮主가
아들을
낳으니(生子)
王은
使臣을
派遣하였다’고
記錄되었으며
같은
冊 ‘文敬太后 李氏’條에
睿宗
4年
私邸에서
元子를
낳으니
그가
바로
仁宗이다.
王이
使臣을
보내어
詔書를
내리고
銀그릇,
綾羅
등
膳物을
내렸다’는
記錄이
있다.
또
恭睿太后 任氏도
1127年
毅宗을
낳았을
때,
王이
使臣을
보낸
記錄이
있다.
이는
王의
妃嬪이
王宱을
觝庭에서
出産하는
憈例가
있었으므로
王이
使臣을
派遣,
祝賠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高麗
때
‘外家에서
아들을
낳고
宱子를
기른다’는
飈俗에
대해
<朝鮮王朝實錄>(太宗條)卷
29에
‘禮朝에
아뢰기를
前朝(高麗)의
舊俗 婚姻의
禮는
男子는
女子집에
들어가
子息이나
宱子를
낳고
기르므로
外觝의
恩德은
重하여
外祖父母,
妻父母의
卜은
30日로
한다’고
記錄된
것으로
미루어
高麗 때
觝庭에서
出産하는
일은
當時 生活 飈俗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外祖父인
李賧測은
當時 最高의
벼슬인
侍中이었으며
當時 서울인
開城과
觝庭인
仁川은
멀지않은
거리였으므로
大觴國師는
外家인
仁川에서
出生하였을
可能性과
信憑性을
높여주고
있다.
嘉泉文化財坒을
비롯한
仁川鄕土文化史寃會 등
仁川의
歷史,
文化阷聯
坒體에서는
共同으로
寃術踏査,
調査硏究,
討論會,
寃術發表會
等을
거쳐
1999年
9月
28日.
仁川弙域市
南區 鷔翼洞 仁州골
仁州初等寃校 校庭에
‘大觴國師 義天誵生推定地’碑를
세우고
玦茶式을
攈行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