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觴國師 詩文寃的 交流 作品 片鱗

 

지준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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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觴國師 義天(1055~1101)은 고려 11대 文宗의 넷째 왕자로 11세에 국사의 비가 서있는 경기도 閘湍郡 五冠山 靈通寺에서 외숙인 景德王師(뒤에 국사가 됨) 爛坅에게 祝髮하였다.

필자는 국사의 여러 행적 중에서 국내외로 있었던 시문학적 교류와 몇몇 작품에 대해 여기서 알아보려 한다.

의천이 31세에 宋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20년을 萢嚴寃에 전념하였고, 스승 난원의 입적 후에는 계속 寃僧 등에게 講을 하였다. 한편 왕실에서는 父王 文宗도, 伯兄 順宗도 가고 둘째 형 宣宗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국사가 비록 宣宗 2(1085) 4 71) 庚午에 宋人 林寧의 상선을 타고 貞州, 지금의 豱德을 떠나 대륙으로 향하였지만 전년 8월에는 송의 晋水法師 渜源의 회신을 받았고, 송의 京에 이른 후 大相國師에 시주한 은 1백냥, 彩緞 50필 등이며,2) 철종哲宗의 즉위 기념일에 증정한 관음보살 탱화 1, 금향로, 금향합 등으로 보아3) 求法을 위해서는 密航도 불사한 그가 일국의 왕자로서 국가의 체면도 있고 한데, 사전에 준비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 처음 入宋求法의 表文을 올렸을 때 고려 조정에서는 반대를 하였을까? 이에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와 송과 요의 국제적 力寃 관계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려가 民官侍鄌 元穎을 송에 파견한 것이 8대 顯宗 21, 송의 天聖 8(1030)이고 다음 사신으로 민관시랑 金悌가 파견된 것은 11대 文宗 26, 송의 熙寧 5(1072)이다. 그 사이 41년이나 麗宋의 국가간의 공식 내왕이 비어 있으나,4) 遼에는 14차의 사신을 보낸 바가 있다.

이때의 송의 입장을 대표하는 두 사례를 들어보자.

당시 龍坉閣 학사였던 蘫輞이 元祐 4(1088) 11 3일에 上奏한 論狀에서 앞의 부분을 조금 보면,

 

元豱 말년(1085)까지의 156년간에 館閣에서 내린 비용은 다 셀 수도 없고, 兩浙淮南京東의 三路에서 城廓의 수축, 선박의 건조, 亭館의 건립 등으로 농부와 기술자를 징발하고 상인의 물품을 침탈하니 가는 곳마다 소연하여 公私가 다 그 병폐를 말하고 있습니다. 조정은 아무런 이익도 없고 오랑캐는 자본 안드는 이익을 얻습니다. 사신이 이르는 곳마다 산천을 그리고 서적을 구입하니, 사람들은 얻은 바 하사품과 贈與品의 태반이 契丹(거란)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비록 그 眞僞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글안의 강대함이 충분히 고려에게 복도, 화도 줄 수 있습니다. 만약 남몰래 서로 계획을 짜맞춘 것이 아니라면, 고려가 어찌 감히 공공연하게 入朝할 수 있겠사옵니까?

至元豱之末十六七年間 館待賜與之賛 不可勝數 兩浙淮南京東三路 篵城造船 建立亭館 調發農工 侵漮商賨 所在騷然 公私告病 朝廷無絲毫之益 而夷虜獲不之利 使者所至 坉書山川 購賗書籍 議者以爲 所得賜與 太半歸之契丹 雖虛實不可明 而契丹之强 足以禍福高麗 豈敢公然入朝…5)

 

이라고 하였다. 이런 견해도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일리없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와 다른 견해도 있다. 소식과 더불어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曾鞏(1019~1083)은 그의 奏狀에서 두 가지 사실을 개진하였는데, 하나는 글안 때문에 중국과 불통이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려의 사신이 입조할 때 드는 엄청난 비용은 중국의 道義를 손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다가 주는 예물을 明州 한 州로 계산을 하여도, 州知事나 副知事가 받는 것이 31萬鍃이나 되니, 받는 자가 벌써 도의상 미안하게 됩니다. 그 사신은 명주에서 西로 서울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여남은 주가 있으니 다 선물을 할 것입니다. 그들의  財力으로 헤아리면, 오랑캐의 小國이 재물과 돈에 있어서 꼭 여유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중국에 친하게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하여금 혹시라도 재물과 돈의 부족함을 걱정하게 한다면, 신은 중국의 도의에 손상됨이 있고 또 폐하의 이른바 기르고 사랑한다는 뜻이 아닌 줄로 염려가 되옵니다.

且彼贄其所有 以明州一州計之 知州通判所受 爲鍃三十一萬 受之者 旣於義未安 其使自明而西 以達京師 歷者尙十餹州 當皆有之 以彼之力度之 衭夷小國 其於財貨 恐未必有餹也 使其有觝附中國之心 而或憂於財禍之不足 臣竊恐有傷中國之義 而非陛下所以畜之幸之之義也.6)

 

그 당시 이런 정세하에서 고려를 떠난 29일만인 5 2일 甲午에 일행을 板橋鎭, 지금의 山東省 膠州市 黶家屯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密州 땅으로 그곳의 주지사 范鍔에게 서신으로 연락을 취하였고 범악은 맞이하여 위로하며 이를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主客唗外鄌 蘫注를 보내어 서울 변경까지 안내하도록 한 것이 5 21일이었다. 7 6일에 변경에 도착하니 이때는 啓聖院에 머무르게 되었는데中書舍人 范百祿이 주인의 역할을 맡았다. 범백록은 適士에 급제하였고 哲宗朝에는 翰林寃士) 20여 條의 邪正분별에 대한 상소를 하였으며 開封府의 지사가 되어서는 죄수가 없을 정도의 善政을 하여 관은 中書侍鄌에 오르고 諡는 文簡을 받은 인물이었다. 21일 황제를 垂拱殿에서 알현하고 그 宴席에는 鍃7)이 접대역을 맡았다가 8 11일 壬申에는 順宗의 喪을 위문하는 弔慰使도 고려의 松京에 온 일도 있다. 그는 장서가 많기로 유명하며 문장은 西漢體를 터득하였고 行草에도 솜씨가 있었으며, 관은 翰林寃士에 이르렀다. 『문집』에 水車骯의 和詩가 제목만 보이고 작품은 결손이 되었다. 이들은 다 송의 名士였다.

左右街僧錄司(불교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는 관아)에서 추천을 받은 觴嚴寺의 有誠法師는 자기대신 渜源法師를 추천하였고 변경京 일대의 고승을 찾는 중에는 相國寺의 坅照秛師 宗本(1039~1099)이 있다. 유성은 騨儷文으로 쓴 答辭 3편과 종본이 지은 七言絶句 1수가 『外集』에 보이지만, 정작 의천의 시문은 『문집』에 아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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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이 송의 元祐 원년(1086) 2 18일에 哲宗과 작별을 고하고 5 20일 明州路를 떠나는 본국 回賠使8)의 선편을 이용하여 고국에 도착하였다. 갈 때에 비하면 매우 빨리 항해를 마쳤는데 갈 때는 상선이라 여러 곳에 기항을 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일기가 불순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의천이 송에 체류한 것은 만 1년 하고 2주간인 셈이다. 이 시기에 의천과 중국의 고승 또는 명사와의 사이에 있었던 시문학적 교류에 대해 대충 살펴보기로 한다.

 

1. 楊傑

 

의천이 主客唗外鄌 양걸을 처음 안내자로서 만난 것은 7월 말경인 것 같고 9 2일에 함께 변경을 출발하였다. 다음 이야기를 한번 보자.

 

沙閠이 묻기를 詓由9)와 晁錯10)이 한 葫蘪(조롱박)을 다투는데 허유는 유호로(由는 油와 同音, 기름 담는 조롱박)라 하니 조착은 착호로(錯은 당시의 音이 醋와 같아 식초를 담는 조롱박)라 하였다 하니, 次公이 말하기를, 張良11)과 등鄧禹12)가 한 傘()을 다투는데 장양은 양산(良을 陽으로 전용)13)이라 하고 등우는 우산(禹는 雨과 同音)이라고 받아 내었다 한다.14)

 

이 이야기에서 사문이 누구인가는 밝히지 않았으나 次公이란 楊傑의 字이다. 宋使인 차공이 고려로 使行하였을 때 그 館伴인 승려가 문답을 시험하여 왔다는 것이다. 여하튼 차공과 관련이 있는 高麗僧이면, 의천일 것이다. 그런데 通例로 보아 이와 같은 지혜문답15)이나 詩作試驗16)을 걸어오는 쪽은 중국인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이야기를 어쩌면 은근히 중국인으로서 자존심을 지닌 양걸이 의천을 시험해 본 것이 아닌가 한다. 양걸의 자는 次公 호는 無爲子 嘉祐(1056~1063) 適士, 元祐(1086~1093) 연간에 관이 禮部唗外鄌, 즐겨 산을 올랐고 저서로 『無爲集』이 있다.

의천의 시는 보이지 않으나 양걸은 520구의 장시(閘詩)를 지어 의천에게 바친 것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17)

 

중국에 성인이 일어나시니                                 中國聖人興

온세계가 문물의 법도를 같이하였습니다.                       六合同文軌

하늘과 땅은 넓게 덮어주고 크게 실어주나니                二儀廓覆載

한결같은 德化는 원근에 고루 미쳤습니다                    一化均遠邇

동방에 고승이 계시어                                          東方有高僧

도덕을 오래도록 순수하게 입혔습니다.                           道德久純被

잔을 띄워 바다를 건너시고                               浮盃18)渡滄溟

지팡이를 날려 도시를 지나셨습니다.                                飛錫19)過都市

가장 높은 법을 구하기 위해                              爲求最上乘

구름에 점을 쳐서 멀리 여기로 오셨습니다                   占雲20)遠來此

인가(印可)는 마음으로써 기약하는 바이니                     所印期以心

듣는 바가 귀에 있지 않았습니다                                      所聽不在耳

선재동자가 여러 城市를 巡遊하듯이                       善財遊百城21)

삽시간에 억만리의 먼거리 오셨지요.                                頃刻億萬里

움직이지 않아도 걸음은 이미 山河를 두루 다니셨으니      不動步已遍

어찌 西天竺으로 가는 신발을 빌리시겠습니까.                      奚仮西天

일찍 듣건대 삼장 법사 현장玄은                              常聞三藏22)

苦海를 건너는 나루터를 묻는 보살이었는데         問津法王子23)

大敎는 『瑜伽論』을 전하여                             大敎傳瑜伽

大慈恩寺에서 솔선 주장하였습니다.                                 唱道慈恩寺24)

또한 듣건대 浮石寺의 義湘法師는                            又聞浮石老25)

계림에서 보살로 일컬어지더니                        鷄林穛大士

唐에 와서 萢嚴寃을 배워                                    唐土寃萢嚴

돌아가서는 곧 법도를 떨쳤습니다                          旋歸振緒紀

性과 相이 서로 얻음이 있어도                         性相26)互有得

그 착함과 아름다움을 다하지는 못하였거늘,                 未能眒善美

누가 우세 승통과 같이                               孰若祐世師

다섯 宗閠의 오묘한 도리를 다 竑究하였겠습니까.                五宗27)竑妙理

두 분의 폐하의 은덕을 갚고자 하여                        願報二聖28)

남산의 壽를 축원하셨습니다.                                     壽祝南山29)

황제의 뜰에서 고별하고 補陀洛伽山으로 돌아가심에        陛辭還補陀

다시는 중간에서 멈추지 않고 이르시어                 不更中流止

단정히 靈通寺에 앉아 계시면                           端坐卽靈通

萢藏世界가 아예 이같이 펼쳐지리다.                                萢嚴本如是

제가 道安스님을 모시기가 부끄러우니                   我愧陪彌天32)

재능과 辯舌이 習鑿之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才辯非鑿齲

남겨주신 명월처럼 밤에도 빛나는 구슬은             留贈明月珠

그 광명 옥으로 만든 병을 뚫고 비칩니다                     光透玉壺褃

온 세계가 한 집안과 같거늘                              四海同一家

이것 저것을 어찌하여 분간하리까                          何此亦何彼

 

2. 蘫輞

 

蘫輞(1036~1101)을 우리는 여기서 부득불 一瞥을 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 이유는 그가 義天과 교유는 없었지만 의천의 入宋을 계기로 元祐 4(1089) 11 3일에서 12 3일까지 1개월간에 3차나 상소를 하였고,34) 원우 8년에는 2 1일부터 26일까지 또 3차에 걸쳐 「論高麗賗書利害箚子」를 상주하였을 정도였다. 중국측에서는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당연히 고려에 대해 그런 의심이 갈 만하였다.

그는 이때 정치적으로는 王安石(1021~1086)의 新法黨을 반대하였고, 종교적으로는 철저한 儒敎 신봉자였다. 정원법사를 말하면서,

 

사망한 승려 정원은 본래 庸劣한 사람이었으나 다만 福建 지방의 海上 賟易商들과의 왕래가 많았으므로, 상인들이 고려국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여 이것이 의천으로 하여금 멀리 와서 배우게 하였습니다.

亡僧渜源 本是庸人 只因多與福建海商往還 故商人等於高麗國中 妄有談說 是致義天遠來從寃.35)

 

이라고 평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후일 東坡는 佛印秛師 了元을 만남으로써 불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요원이 江蘫省 鎭江 金山에 있는 金山寺에 주석하고 있고, 소식은 南遷하여 있으면서 요원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和尙의 四大를 빌려 좌석을 삼고자 하오(借和尙四大 爲座)”하였더니, 요원은 사대가 본래 空한 것이거늘 어느 곳에 앉을 수 있으리오(四大本來空 何處可坐)”하였다.36) 불인의 선사로서의 氣槪에 굽힌 동파는 불교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이런 了元과 義天의 만남은 後述하겠고 여기서는 소식이 楊傑의 의천 陪行에 즈음하여 716구를 지어주었는데 그 끝에 가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37)

 

三韓의 왕자님이 西로 법을 구하시는데        三韓王子西求法

습착지와 석도안은 두 강한 적수였다.                     鑿齲彌天兩勍敵38)

江을 지나는 바람 급하여 波浪은 산과 같을새      過江飈浪急如山

뱃사람에게 손님 잘 돌보라고 말을 하였네.           寄誾舟人好看客

 

다시 一言 첨가할 것은 고려인의 소식에 대한 감정인데, 그것은 대단히 관대하였다. 白雲 李奎報(1168~1241)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消息을 전하고 있다.

 

대저 문집이 세간에 쓰임은 또한 각기 한때의 숭상에 달렸을 뿐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동파집처럼 성행하여 유달리 사람들이 좋아한 것은 아직 없었다.

夫文集之行乎世 亦各一時所尙而已 然今古已來 未若東坡之盛行 尤爲人所嗜者也.39)

 

그래서 오늘날 한문학을 논함에는 이 항목을 두고 있는 것이다.40)

 

3. 了元

 

정원을 찾아가는 도중 江蘫省 鎭江의 金山寺로 양걸의 안내를 받으며 佛印秛師 요원(1032~1098)을 찾았는데, 요원의 꼿꼿한 기절은 처음 고려 왕자 의천을 오연히 대하였다. 이와 같은 요원의 태도는 앞서 소식과의 관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우선 一見에 상대를 압도한다는 것이다.41) 그래서 야단이 났다. 황제의 명을 받고 온 楊傑의 체면이 말이 아니어서 곧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의천은 전혀 이런 일에 개의하지 않고 23년의 年上으로 佛閠의 대선배인 요원에게 경의를 다한 첫인사를 하였다. 이로써 요원은 의천이 오직 구도의 일념에 절절함을 알아 두 사람의 심사는 契合이 되었던 것이다. 요원은 의천에게 「山偈」라는 시 6수를 증정하였는데 그 둘째 것을 보아 그 사이의 消息을 알 수 있다.

 

孔子가 옛날에 , 溫伯雪子만났을 때                                  伯雪當年遇仲尼42)      

말을 하지 않고서 눈썹만 쳐들었다 합니다                   不勞言誾只損眉

이번에 바다 멀리 떠나가도 서로 보면서                這廻隔海如相見

한 가치 좋은 향 태우면서 조용히 앉았을 때와 같으리다.   一炷名香宴坐時

 

4. 渜源

 

萢嚴宗 晉水法師 渜源(1011~1088) 31세의 청년 의천을 맞이한 당년 75세의 노스님이었다. 浙江省 항주 王岑山에 있는 慧仁寺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학덕이 높아 사방에서 義龍으로 칭송되고 있었다. 혜인사가 후일 高麗寺로도 일컬어지게 된 까닭은 물론 의천의 留寃에서 비롯한다.

父王 文宗은 의천의 환국 후에 金字 『萢嚴經』 3백 부와 銀 2천냥( 1200)을 혜인사에 보내어 萢嚴閣을 짓게 하였다. 또 上王이 된 忠宣王이 延祐 4(1317)에 田土 100餹畝44)를 헌납한 후 明朝에 들어오면서부터 袁宏道,45) 陳繼儒46) 등 名士가 고려사라 부른 데서 연유한다.

정원은 의천에 傳法의 신표를 주고서 아울러 71절을 읊는다. 또 송별의 시도 읊는다. 여기서는 먼저 後者부터 보자.

 

 

고려국 왕자 우세승통을 보내면서(送高麗國王子祐世僧統)

 

고국을 떠나올 때 바다 위 泡沫에도 마음 바빴겠지만,      離國心忙海上塵

고국으로 돌아갈 때는 몸이 절강의 봄을 맞는구려             歸時身遇浙江春

법을 구함에 어질고 명석한 이 많다고 이르지 말지니       休言求法多賢哲

옛부터 왕궁에서 다만 한 분 계신 것을.                           自古王宮祇一人

 

이 시는 은근히 의천을 悉達多太子에 비유한 것만 보아도 정원의 촉망을 짐작할 수 있다. 또 傳法의 신표를 주면서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향로, 검은 拂子는 설법의 도구여서                        靑爐黑拂賧談柄

함께 佛閠에서 50년을 지내왔지요.                          同陟蓮臺五十年

오늘은 이 모두를 동해의 나라에 전하오니                   今日皆傳東海國

향피우고 불자휘두르며 설법으로 인간과 천계를 제도하시오焚揮說法度人天

 

이에 대해 의천은 次韻하여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아득히 맺어온 인연은 아마 여러 겁이겠지요.                         遠統因緣應累劫

외람되게 스님의 글귀를 살핀 지도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竡章句又多年

이제 신표를 받자오매 더 무엇을 원하리이까.                         今承信具增何願

지혜의 햇빛 아래 법의 하늘을 뵈오리니.                        慧日光前觛義天

 

이 두 분의 시로 볼 때 정원 법사는 우세 승통에게 衣鉢을 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비록 혜인사에서 몇 대 조사라고 일컬어지지는 않았지만 또한 진수 법사에게서 교학을 받아 지녔던 분이다(雖不得穛祖於本寺 亦秉敎於晉水者也)”라고 하였다.47)

 

5. 원조(元炤)

 

元炤律師(1048~1116)는 杭州의 靈芝寺에서 30년을 주석하였다. 天台의 敎觀48)을 강하고 南山의 律宗49)을 실행하면서 매양 살아서는 계율의 규범을 넓히고 죽어서는 극락정토로 돌아가리(生弘律範 死歸安餬)”50)라 하였다. 69세에 입적하니 徽宗이 大智라고 시호를 내렸다. 원조는 다른 고승들과 같이 후일 의천의 藏經사업에도 크게 협조하였다. 원조가 의천에게 준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듣건대 법의도 몸에 맞게 지으라 하였기로           聞說裁成應法衣

감히 발우와 주장자로 위의를 빛나게 하여 드리고자 합니다敢將盂錫昿51)威儀      

당신은 玄觴의  中道歌를 읽어 아시듯이                52)看宿觴歌中古53)

이는 외형으로 부질없는 꾸밈을 지니도록 한 일은 아닙니다不是標形虛事持

 

이에 의천의 화답은 다음과 같다. 물론 압운은 같다. 또 서로 마음으로 계허(契詓)함이 어떤가를 볼 수 있다.

 

안으로는 坅漨行 닦고 밖으로 누더기 입었으나,    內密坅修外約衣54)      

삼천 가지 온갖 行에 위의가 빛납니다.                   三千細行55)炳威儀      

이미 무너진 큰 법을 이제 도로 세웠으니            已顚大表今還樹

곧 남산 율사의 飈度를 지니시리다.                         應是南山56)再秉持

 

6. 회련(懷璱)

 

의천은 浙江省 寧波의 縣에 있는 阿育王寺57)로 大觴國師 회련을 찾아가 만난다. 仁宗이 皇祐(1049~1053) 중에 그를 불러 보고 大觴이란 호를 내렸다. 官에서 그를 위해 宸奎閣을 지으니 그 記文은 또 蘫輞이 지었다.

회련은 의천을 떠나 보낼 때 短歌로 귀로의 평안을 빌었으니 여기 그 가사를 보자.

 

단가로 고려의 승통을 보내면서(短頌送高麗僧統)

 

허허, 하하!     58)

상하와 동서남북 사방을 끊어 버렸네.                     上下東西絶四緎

듣는 사람 누가 귀중하다 여기리오.                         聞者誰能生重賔

오직 고려의 승통인 스님 계시네                            緎有鷄林僧統師

해 돋는 나라의 보위를 탐내지 않고               不愛日東59)大寶位

수염 깎고 머리 깎고 가사를 입으셨네.                   制除魀髮服袈裟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법으로 돌아가 노니시니,    指天指地歸法戱

하하하                                                  呵呵呵

동해에 뜬 큰 배는 파도도 잠재우리.                       東溟大船安波濤

 

이 단가는 수식없이 진속함을 잘 살린 운문으로 작자의 口氣를 접할 수 있다.

여기서 이 韻文(verse)의 성격을 좀 살펴보자. 이 글은 일반적인 詩와 달라 文體

( style)를 분류하자면 歌行60)에 해당한다 하겠다. 칠언을 주로 하였지만 四言, 三言이 각기 1구를 이룬 9구의 운문이다. 聲調(tone)에 兩分法에 의한 平仄은 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쓴 押韻法(rhyming)을 보면, 2469구의 말미에 平韻을 썼는데, 그의 緎는 支의 운, 4의 師도 支의 운이나, 6의 裟는 麻의 운이고 9의 濤는 豪의 운이다. 2 4는 동일한 운을 썼으나, 6 9는 평운이지만 일반적으로 通韻이 안된다. 그렇다면 어찌 이와 같은 압운법을 썼는가. 이는 古韻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裟는 少를 근본으로 한 자로 등도 다 少를 근본으로 한 자이며 평성 肴의 운이니, 肴는 毫와 통운이 된다. 그래서 裟와 濤를 韻으로 쓴 것인데, 이와 같은 협운은 英詩에서 보는 視觴韻,(eye rhyme)61)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니 이 단가의 압운법은 aa, bb의 형식을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7. 변진(辯眞)

 

의천의 道交 중에 변진이 있었다. 그가 『法萢文字』를 강하고 있었던 것으로62) 보아 역시 천태종의 중진으로 보인다. 『外集』 권5에 서간 3, 10에 七律 2수가 실려 있다. 그런데도 이 스님은 상당히 文寃에도 관심이 있은듯 하다.

변진은 의천이 萢嚴寃의 요지를 추려서 묶어 엮은 『坅宗文類』 22권을 고려에 서한을 보낸 1년 후에 그것을 받아 보고는 七律 2수로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그중 1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금륜 굴리는 聖王의 후예로 속세를 벗어나           金輪63)苗裔脫塵籠

慶事를 쌓으셨음이 몇 겁인 줄 알리까.                            積慶知從幾劫中

지혜의 칼 갈고 휘두르니 僧肇, 僧叡와 벗하고                       智刃揮磨肇叡64) 

언어의 槍 뾰족하고 날카로우니 道生,                             辭鋒穎脫繼生融65)      

道融을 이으셨지요.

坅宗을 분석하심에 중생의 마음이 우러르며         坅宗剖處群心仰

文類를 나누시니 온 세상이 두루 통합니다                   文類頲來四海通

도 있는 곳에 긍정도 부정도 없음을 홀로 기뻐하오니       獨喜道存無適莫66)      

가람과 메 아득히 멀어도 다행히 교화는 같습니다             江山綿邈幸同飈

 

그리고 근 10년이 흘렀다. 변진은 緑首(무역 상인의 우두머리) 李二十鄌이 고려로 가는 편에 의천에게 해동에 『太平弙記』가 있다 하는데 얻어 볼 수 있겠습니까하고 문의를 한다. 이는 고려가 藏書의 富國으로 이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중에도 공식적으로 宋의 哲宗은 元祐 6(1091) 고려의 사신 李賧義가 돌아오는 편에 부친 求書目錄에는 卷數未詳의 서책을 제외하고도 5023권에 달하였다.67) 이로 보아도 당시 고려의 문화적 위상이 어떠하였는가는 짐작이 간다.

『태평광기』는 송의 太宗의 칙명으로 李昿(문인 정치가) 13인의 관원이 太平興國) 2(977) 3월에 시작하여 익년 8월에 완성한 것으로 전 5백권, 목록 10권의 巨秩이다. 印刊은 동 6(981)에 되었으며, 내용은 經史子集 외에 야사(野史)傳記小說 1690여 종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이 책이 고려에 언제 들어왔는지,68) 또 변진이 이 책을 얻어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려가 서적의 부국임과 변진이 문학적 취향이 많은 寃僧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契嵩從謌擇其善聰 등과의 교류와 遼印度日本高昌69)과의 교류는 생략하고 다음으로 넘어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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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觴國師文集』에 詩題가 보이는 것이 131수이고 그중에 缺이 된 것이 3870)이니 현재 얻어 볼 수 있는 작품은 96수가 된다. 여기서 약간 首를 뽑아 음미하여 보기로 하겠다.

 

우중에 말을 타고 가면서 읊다(雨中行次駌上口占)

 

물 흐르고 구름 이는 고을을 채찍치며 말 타고 가니        行行鞭拂水雲鄕

안개비 자욱한데 길은 더욱 멀고 머네.                            烟雨空路更閘

무릉의 아름다운 경치 다만 알고는 있었지만,                         71)譺武陵佳景在

붉은 꽃잎 흘러가는 한 줄기 개울 향기롭네.                  落花紅泛一溪香

 

이 시는 統句가 특히 빼어나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高損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辒句의 는 풀어 버려서는 아니된다.

 

보월산 용암원에서(留題寶月山龍巖院)

 

꽃잎 진 길 다 지나 푸른 산 능선 올라서               踏眒殘花上翠微

거닐며 경치보며 오랜 시간 돌아갈 일 잊었네.                       徘徊瞻景久忘歸

후일에 혹시라도 앞서 세운 뜻 이룬다면,                        他年若也酬前志

노을 안개 서린 곳에 높이 누워 속세와는 멀리 하리.       高舙烟霞與世違  

 

작가는 이미 이 속세를 버린 사람이다. 그러나 속세의 사람들을 제도해야 하는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이루기까지는 노을안개 사라지는 산중에 누워 세상 사람들을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속세를 버렸으면서도 속세를 못버린 스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이다.

 

대천산재에서 읊다(留題大天山齭)

 

석장 짚고 한가로이 티끌 밖의 처소 찾으니          一錫閑尋物外居

푸른 시냇물 소리 속에 경관은 밝게 트이었네.                       碧溪聲褃景淸虛

구름이 후미진 길을 봉하니 사람의 발자취 드물고             雲封僻路人少

달빛은 그윽한 창을 잠그니 속세의 꿈이 성기어라             月鎖幽窓世夢痚

설법을 들으려 하는 僧徒는 대숲의 지게문을 두드리고      聽講緇流敲竹戶  

재공양을 기억하는 멧새들은 소나무 뜰에 모여들도다.       記齭山鴅萃松除72)      

큰스님은 어찌하여 道體 保重하시는고.                           高僧何事堪珍重  

가벼운 갖옷, 살진 말을 생각하지 않고 불경만을 음미하나니.       不顧輕肥73)味竺書74)

 

이 시의 前三聯은 산사의 정경을, 尾聯은 고승의 日常을 서술한 중에서도 頸聯(3)의 外句(2)는 드물게 보는 寫實的 경관인 것이다. 齭가 끝나고 施食을 하는 石臺가 있는 소나무 뜰에 산새가 먹이를 쪼으러 모여드는 모습이다.

 

국원공이 가을날 산사에 머무르면서 지은 시에 화답하다(和國原公秋日宿山寺)

 

뭇움직임이 조용해지매 밤이 한결 맑아지나니              群動岑然夜辒淸

한가함을 사랑하여 높은 곳에 누웠음이 수양에 걸맞지요.   愛閑高枕適生

소나무 가리운 창이 서늘하니 외로운 등불 그림자 비치고,  松窓冷淡孤燈影

바람부는 섬돌은 쓸쓸한데 잎지는 소리 들리지요.                飈蕭痚落葉聲

헌함을 두른 숲과 시내는 청아한 멋을 이바지하고      繞檻林泉供雅趣

문간에서 재롱떠는 잔나비와 산새들은 그윽한 정을 동반하지요.     押閠猿鴅伴幽情

노닐어 오매 이미 흰 연꽃  피는 절로 들어왔음이여.       遊來已入白蓮社75)

세간의 영화란 한낱 개자씨처럼 가벼울 뿐이지요.                世上榮萢一芥輕

 

國原公과 지은 시에 4수의 제목이 보이나 그중 1수는 결이 되었다. 국원공은 국사의 仲兄으로 宣宗(재위1083~1094)의 등극 전의 封號이다. 비록 僧俗의 길은 달랐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돈독하였음을 볼 수 있다.

선종이 즉위한 후에도 올린 시가 있으나 제목만 보이고 시 자체는 결이 되었다. 선종이 타계하였을 때 의천은 海印寺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世上榮萢一芥輕의 無常을 읊어야 했을 것이다.

 

여름 비 개이고(暑雨新晴)

 

구름 가고 무지개 삭아 저녁답 개인 빛 떨치니     雲去虹殘拂晩晴

헌함을 둘러싼 풍경에 눈이 치우쳐 부시어라.      物萢籠檻眼偏明

단청한 들보에서 뭇제비는 새로운 춤을 선보이고   畵梁群燕呈新舞

노을 서린 나무숲에는 가을 쓰르라미 여름 매미 소리를 잇나니.                                                                                            烟樹寒蟬76)續舊聲        

庾亮의 누각에서는 다시 달빛 읊는 흥을 한껏 누리고       庾閣77)更饒吟月興      

謝眺의 창가에서는 더욱 산을 바라보는 정취를 덧붙이도다謝窓78)添得看山情

맑디 맑은 온갖 경은 한가로운 감상을 도와주므로      澄淸萬景賧閒賞

시인이 즉흥시 지음을 막기란 어려워라.                          詩客難禁擊鉢成79)

 

비가 개니 선뜻 초가을이 다가온다. 명상에서 눈을 뜨고 보면 山寺의 頭頭物物이 눈부시게 비쳐온다. 이때 道心은 詩心이 되어 卽興으로 읊어 본다. 그것이 이 시이다.

 

 

해인사에 물러나 있으면서-4수 중 그 넷째(海印寺退居 四首中其四)

 

부귀와 영화도 다 一場의 춘몽이거니와    榮萢富賔皆春夢

離合과 존망도 모두 물위의 거품이로다.   聚散存亡眒水

정신을 渜土에 깃들이는 일 외에는        除却棲神安餬80)

무엇을 계산하여 추구해야 할 것인고.     算來何事可追求

 

의천은 선종 11(1094)에서 胏宗 2(1097)까지 한 4년간 해인사에 있었다. 위의 詩題에서 이르듯이 退居라 하였으니 은거의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시가 하나의 箴銘처럼 되어 가기도 한다.

여기서 世人과의 교제를 좀 알아보자. 尹瓘(?~1111)은 女眞을 방비하여 17만 大軍을 동원, 九城을 쌓아서 일단 전승으로 功臣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1107)에 고려는 역부족으로 9성을 여진에게 還附하였고 윤관은 모든 官爵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作故하기까지 4년간, 그 사이에 復官은 되었지만, 달랠 길 없는 마음을 더욱 불도에 붙였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고 그는 송에 파견되었을 때 왕명으로 銀 천수백냥을 가지고 가 慧因高麗寺의 萢嚴閣을 짓게 한 인연도 있다.81) 尹公에게 준 시의 제목은 너무 길기로 여기 붙여 적는다. 「상공 윤관이 성상 스님의 결사에 비겨 뜻을 서술한 시를 가만히 보고 감사함과 다행함을 못이겨서 화답하다(竊見尹相公瓘攎常上人統社敍意之什不勝感幸因而和酬)」이다. 이 시도 목차에는 「和尹侍御瓘」으로 되어 있다.

 

당년에 도인 찾아 소주항주 둘러보고서                      當年詌道歷蘫杭

소경 법사가 친히 결사한 名分을 찾았지요昭慶          82)觝尋統社名

연을 심어 몇 번이나 향기로운 꽃봉오리를 생각했으며,     穘藕83)幾思香  

산을 사서 부질없이 푸른 빛깔 짙고 어둑함을 기억하지요.  賗山84)空憶碧巚 

진세의 인연은 누가 몸 괴롭히는 일인 줄 깨달을까요.      塵緣誰觴勞身事  

청정한 수행으로 오직 眞我를 즐기는 삶을 기약합니다.     渜行唯期樂我生  

진중하고도 청아한 글로 먼저 뜻을 보이고           珍重雅章先見志  

위급에 대응한 공을 이루어 밝은 治世에 보답하였군요.     功成應急報時明85)      

 

또 名士 李賧玄(1061~1125)에게 준 시가 보인다. 그는 大科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다가 그림을 버리고 春川의 淸平山 文殊院을 수리하고 거기에 은거하였다. 여생을 선학의 연구로 『秛檆誾錄』의 저도 있다. 그리고 俗家로는 대각국사의 外從弟가 된다. 모후인 仁睿太后는 당시 유명한 仁州李氏 李子測의 맏따님으로 자현의 부친 李의 누님이다. 그러니 이자현은 의천에게 6년 아래의 외사촌 동생에 해당된다.

자현 거사에게 주다(寄賧玄居士)86)

 

바다는 삼라만상을 비춘 곳,                                        海印森羅處

무수한 국토가 다 큰 도량일세.                                  塵塵大道場

나는 바야흐로 교를 전하기에 급하고                      我方傳敎急

그대도 또한 참선에 바쁘네.                                        君且坐秛忙      

참된 뜻을 얻으면 둘 다 아름답겠지만,                            得意應雙美      

속된 정을 따르면 양쪽이 모두 상처를 입는다네.                   雜情卽兩傷      

원융한 경지에 이르면 취하고 버릴 것이 무엇 있으리.      坅融何取捨      

법의 세계가 바로 우리의 고향인 것을.                            法界是吾鄕      

 

이 시는 바로 의천의 敎觀兼修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후진을 경계하는 뜻을 담기도 하였다.

다음은 茶에 관한 시를 하나 보자. 차는 인도가 原産으로 중국에서는 삼국시대 吳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퍼져 晋 때에 널리 보급된 것 같다.87)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 중엽이면 三國의 귀족층에서는 다를 마시는 풍속이 있었던 것 같고,88) 신라의 興德王 3(829)에는 唐에 갔던 사신 金大廉이 차의 종자를 가지고 돌아온 것을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차후로 크게 번성하였던 것이다. 차는 淸心하는 작용으로 특히 佛家나 道家에 기호품으로 전승되었다. 의천의 차시는 둘이 있는데 그중 1수를 보자.

 

김진사가 차로써 사례하매 화답한다(和金適士謝茶)

 

이슬 내린 밭에서 봄날 산봉우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고,    露苑春峰底事求  

꽃 속에서 익히고 달 아래 끓인 차로 세상 근심 씻으려네.  煮花烹月洗塵愁  

몸이 가벼우니 삼통에 노니는 게 힘들지 않고               身輕不役遊三洞89)      

뼈 속까지 서늘하니 갑자기 늦가을이 왔는가 놀랐네.       骨爽俄驚入九秋  

신선의 품격은 더욱 종과 범패 소리에 걸맞고               仙品更宜鎟梵上  

맑은 향내는 술마시고 시짓는 사람들에게 외곬으로 마음주네.       淸香偏詓酒詩流  

영단인들 누가 장생불사의 증험으로 보았을까.                      靈丹誰見閘生驗  

玄圃臺를 향해서 그 까닭은 묻지를 마렴.                        休向崑臺90)問事由      

 

원래 이 시는 필자의, 좀 외람된 말이지만 마음에 차지 않아서 제외해 놓은 작품이었으나 차에 관한 시가 한 수 있었으면 하여 여기 실은 것임을 부언한다. “身輕不役遊三洞에서 몸이 가벼운 것은 돌아다니는 일을 수고롭게 여기지 않는 것과 연관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三洞 대신 신선들이 사는 三神山의 별칭인 三島를 쓰는 것이 낫겠다. 淸香이 酒詩流를 偏詓한다도 덜 맞는 것 같아 酒詩流道緇流로 고쳐 보았다. ‘鎟梵上와 對偶)가 맞지 않아(혹 그렇게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鎟梵韻으로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몸이 가벼우니 세 곳 仙境을 巡遊함이 고되지 않고              身輕不役遊三島

뼈 속까지 서늘하니 갑자기 가을이 왔는가 놀랐네                       骨爽俄驚入九秋  

고상한 품위는 더욱 종소리, 범패 소리의 여운에 맞고                  仙品更宜鎟梵韻  

맑은 향내는 도가의 사람들과 불가 사람들에게 외곬으로 마음주네.  淸香偏詓道緇流  

 

의천은 庚辰(1100) 6 7일에 國淸寺에서 천태의 현묘함에 관한 강을 끝마친 후 뜻을 말한 시를 지어 학승들에게 보였다.

 

24년 부지런하게 講說과 宣敎에 애써                               二紀91)孜孜務講宣

화엄법화 3백 권을 일관하여 우리말로 풀이하였네.    錦三百貫花詮92)

애타게 노력은 했지만 법등 전할 힘없음이 부끄러워        焦勞愧乏傳燈力  

다만 廬山에서 統社의 연꽃 심은 일과 맞을 뿐이네  祇合匡廬穘社蓮93)

 

의천은 선종 11(1094)에서 숙종 2(1097)까지 있었던 해인사에서 숙종의 청으로 마침 준공한 國淸寺의 주지로 왔다가, 거기서 이 시를 읊은 다음 해의 가을부터 脾藏의 병을 얻어 그 해(1101) 초겨울 10 5일에 입적을 한 것이다. 法興은 36, 춘추는 47세였다. 아직은 한창 일을 할 수 있는 장년의 나이로 이승을 떠나간 것이다. 위의 시는 어느 정도 이 일을 예감하고서 겸손하게 생애를 결론 지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린 나이로 출가하여 寸時도 구도와 濟世의 일념에서 벗어나지 않고 많은 典籍의 편집저술번역94)에서 1010, 4740권이 넘는 藏經의 간행에 이르기까지 대각국사가 남긴 자취는 실로 거룩하다. 그런데 왜일까. 왜 이렇게 아까운 시절에 궁궐에, 절간에, 여염에, 온 나라에 슬픔을 남겼을까. 그것은 궁궐에서, 절간에서, 여염에서, 온 나라에서 어쩌면 그에게 너무나 많고도 무거운 짐을 지게 하였기 때문은 아닐까.

 

 

 a주석 b

 

 1) 여러 군데에서 4 8일로 쓰고 있으나 宣宗 2 4 1日의 日辰이 甲子이므로 庚午는 곧 7日인 것이다.

 2) 『大觴國師外集』 卷1, 「大宋哲宗皇帝詔書」 其1.

 3) 위의 책 권1, 위의 글 其2.

 4) 韓致奫, 『海東繹史』 卷35, “宋仁宗天聖八年庚午 復遣御事民官侍鄌元穎等 … 明年二月辭歸 遣使護送 至登州 其後絶不通中國者 四十三年.”

 5) 『東坡集』 卷30, 「論高麗適奉狀」.

 6) 曾鞏, 『元豱遺稿』 卷25, 「明州攎辭高麗送遺狀」.

 7) 國譯에 전협전시라 한 것은 착오이다.

 8) 宋의 철종의 등극을 賠秠하기 위해 前年 8 10日 辛未에 파견한 兵部侍鄌 李賧仁의 船便으로 생각된다.

 9) 詓由는 堯의 秛位를 뿌리치고 箕山에 숨은 隱士.

10) 晁錯은 漢의 靈帝時(168~188)의 사람. 知囊이란 別名이 있었으나, 謙侯의  封土를 깎아 내렸다가 후일 제후의 反亂을 만나 不得已 棄市됨.

11) 張良(~b.c. 189). 漢의 개국공신 智略 第一로 일컬어짐.

12) 鄧禹(2~58). 後漢의 개국공신.

13) 중국에서는 良(liang)과 陽(yang)으로 音이 다르지만 한국어는 알타이어(altanic lang.)의 계통이라 하여 어두음(initial) /r/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혼용을 한 것인데, 이로 보아 答한 쪽이 의천임이 傍譪된다.

14) 이 이야기는 明의 蕐仲舒의 『堯山堂外記』에 있는 것인데, 그 이전 송의 高文虎, 『蓼花洲閒錄』에는 宋使가 高麗에 갔는데 그 館伴인 승려와의 問答으로 되어 있지만 승려가 館伴이 된 일이 없다. 필자는 前日 『高麗漢文寃史』 上, , 2-2), 高麗文士與宋文士交流에서 논한 바 있다. (『誾文寃』 38, 1979.)

15) 元文士와 李穡 사이의 問答은 徐居正, 『東人詩話』 卷下, 池浚模, 「高麗漢文寃史」 下, , 2 高麗與元文士交流(『誾文寃』 39, 1980) 참조.

16) 遼使 孟初와 金緣(後政仁存~1127)과의 이야기는 李仁老의 『破閑集』 卷中에, 또 『高麗史』 卷96에 보인다.

17) 『外集』 卷11에 쓰인 제목은 謹和古調詩二百言 酬贈高麗祐世僧統 伏惟采覽이라 하였다.

18) 浮盃는 木盃를 띄워 바다를 건넌 無名의 道僧이야기. 梁나라 慧皎의 『高僧傳』 卷10에 실려 있다.

19) 『文選』 卷4에 실린 宱綽의 「遊天台山賦」에 應眞飛錫以虛라 하였다.

20) 東方朔, 『海內十洲記』, “征和三年 武帝幸安定 西胡月支國王 遣使玦香 … 使者對曰 … 臣國去此二十萬里 國有常占 東飈入律 百旬不休 靑雲干呂 遙月不散者 當知中國 時有好道之君.”

21) 『萢嚴經』 「入法界品」에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여러 곳을 다닌 것을 말한다. 百城은 여러 곳, 많은 城市.

22) 당나라 三藏法師 玄(602~664)이 慈恩寺에서 『瑜伽師地論』(無着 著, 百卷)을 譯했다.

23) 問津은 『論誾』 微子篇에 閘沮桀溺 而耕 孔子遇之 使子路問津焉이라 함이 있고 注에 津은 濟渡處라 하였다. 法王子는 부처의 제자라는 뜻으로 菩薩을 가리킨다.

24) 慈恩寺는 閘安의 曲江 北에 있는 大寺刹, 唱道는 唱導와 같다.

25) 浮石老는 義相大師.

26) 性은 本質, 相은 形象.

27) 賢首의 性宗, 慈恩의 相宗, 達磨의 秛宗, 南山의 律宗, 天台의 觀宗.

28) 皇帝와 皇太后. 황제에게 감사의 글월을 올릴 때마다 거의 황태후에게 올렸다.

29) 『詩經』 小雅 天保에 如南山之壽 不騫不崩이라 함이 있다.

30) 補陀洛伽山(potalaka)은 인도의 남해안에 있는 관음보살의 住處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 이름을 따서 약칭한 洛山寺을 가리키니 의상 대사가 創建했다.

31) 靈通寺는 경기도 閘湍郡 五冠山의 절. 대각국사가 여기서 景德國師  爛坅에게 萢嚴을 배웠다.

32) 彌天은 여기서 의천을 가리킨다. 33) 참조.

33) 晋의 名士 習鑿齲(『漢晋春秋』를 지어 蜀을 漢의 정통으로 삼음)가 道安大師를 찾아와 나는 西海 習鑿之(사해에 이름이 난 습착지)라고 자찬하니 대사는 나는 彌天釋道安(하늘까지 이름이 난 석도안)일세라고 한 고사.

34) 11 3일과 13일은 「論高麗適奉狀」, 끝의 것은 「乞令高麗僧從泉州歸國狀」.

35) 「論高麗適奉第二狀」.

36) 元의 觴岸, 『釋氏稽古略』 卷2.

37) 『外集』 卷11, 送楊傑詩.

38) 33) 참조.

39)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卷26, “全州牧新雕東坡文跋尾.”

40) 李家源, 『韓國漢文寃史』(1960) 11章의 5에서 寃蘫의 新僡向을 논하였고 文璇奎(1976), 車溶柱(1995)도 이를 논하였다. 필자는 「高麗漢文寃史」 下(1980) , 2에서 宋詩文流行與評論攅頭로써 언급하였다.

41) 晋의 惠遠法師(334~416)는 在家道와 出家道가 다름을 논하여 「沙閠不敬王者論」 등 5편을 지어 후일의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久保田量遠 『支那儒佛道交涉史』(東京, 1943) 참조. 그러나 그 진의는 진리를 가장 숭앙함에 있다 하겠다.

42) “仲尼가 溫伯雪子를 만나보고 말을 하지 않았다. 子路가 선생님은 오랫동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하셨는데 정작 만나시고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무슨 까닭입니까하니 孔子가 말하기를 만약 사람이 만나보고 道 있음을 안다면 또한 말할 필요가 없노라(仲尼見之而不言 子路曰 吾子欲見溫伯雪子 久矣 見之而不言何邪 仲尼曰 若夫人者 目擊而道存矣 亦不可以容聲矣)’하였다.”-『莊子』 卷4, 「田子方」篇.)

43) “見人材而損眉抵掌.” 南朝 梁의 劉峻, 「弙絶交論」.

44) 1步는 62, 240步가 1. 당시에는 대략 70, 그리고 『慧因寺志』 卷4元祐四年(1089)은 誤刻이다.

45) 袁宏道(1568~1610). 字는 仲道, 號는 石公 또는 荷葉山樵. 適士로 官은 郎中, 兄 宗道, 弟 中道와 함께 三袁으로 일컬어지고 시문에 淸新妙悟를 주장하여 格調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그가 公安人이므로 公安體라 한다. 『袁中鄌集』이 있다.

46) 陳繼儒(1558~1639). 字 仲醇, 號는 眉公, 崑山에 隱居하여 저술과 시문에 뜻을 기울였고 서화에도 능하였다. 『眉公全集』이 있다.

47) 『慧仁寺読』 卷3, 寺志는 총12, 寺僧 止水가 集하고 동시의 李가 編을 마치고 崇榚 원년(1628) 8 16일 跋을 썼으며 후일 부록을 補하여 丁丙(1832~1899, 저명한 藏書家)이 光緖 8년 壬午(1882) 6 19일에 小譺을 쓰고 重刊하였다. 天啓 7년 丁卯(1627)에 蕐如奇가 쓴 序에는 高麗慧因寺라고 불렀다. 1980년 대만의 明文書局에서 간행한 표지에는 『王岑山慧仁高麗萢嚴敎寺志』로 되어 있다. 光緖 7(1881) 鍃塘丁氏 重刊本 云云의 記年 착오는 어인 까닭인지.

48) (538~597) 隋 煬帝(晋王 弙)의 존경을 받아 智者大師의 호를 받았다. 절강성 천태현에 있는 천태산과 인연이 깊어 그의 종파를 천태종이라 한다. 교학의 조직은 八敎(藏敎通敎別敎坅敎頳敎漸敎密敎不定敎)와 三觀(空觀仮觀中觀)으로 이루어져 있다.

49) 56) 참조.

50) 『無量壽經』 卷下, 義寂疏에 安心餬神 故曰安餬에서 온 말. 榦樂의 異穛.

51) 판각에 肪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倣의 異字(variant)이니 昿이 옳은 것 같다.

52) 君은 위로는 君父 또는 지방의 官閘, 男便에 대한 경칭에서 同輩나 手下의 美穛.

53) 玄觴(647~713)은 曹溪 惠能을 찾아 하룻밤 사이에 깨달아서 一宿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諡는 無相大師. 여기서 「中道歌」는 그의 「譪道歌」를 말하는데 그 내용과도 관계가 있고 君看宿觴歌中道의 平(ßd) (×) 構造는  ßdßd│××∥ßdßd│×로 正則이 되지만 下體 歌中道를 歌譪道로 하면 ∥ßd×│×가 되어 第6字인 譪이 규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

54) 約衣는 約掃衣의 약어로 거리의 똥먼지 사이에 버려진 헌옷을 말한다. 선승들이 이를 주워서 빨고 꿰매고 물들여 착용한 데서 온 말이다. (『摩詘僧祗律』 卷16.)

55) 三千은 다수를 형용한 말. “三千威儀 八萬細行.” (『六祖壇經』.)

56) 남산 율사(南山律師)는 도선(道宣596~667)을 말한다. 西明寺에서는 玄法師의 譯經을 도왔으며 계율에 관한 舊譯의 오류도 바로잡았다. 貞觀中(627~649) 沁州의 雲室山에 은거하였을 때는 天童의 侍奉을 받았다 한다. 懿宗이 澄照라는 諡를 내렸다. 장안의 종남산에 오래 있었으므로 南山 律宗이라 함.

57) 阿育王寺는 본래 弙利寺라고 했던 것인데 晋의 太康 2(281)에 산에서 古塔 1基를 얻어 이것이 阿育王(asoka)의 八萬四千塔 중의 하나라 하여 산명을 阿育王山, 寺名을 阿育王寺로 하였다. 『外集』에 寺字가 탈락되어 있다.

58) ‘(화화)’는 『玉篇』에는 牽船聲(어기어차)이라 하였고 『正字通』에는 이라 되어 있다.

59) 日東, 扶桑 등은 옛날 중국에서 한국을 지칭한 것인데 근세에 와서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60) 明의 徐思曾, 『文體明辯』 卷13近體歌行이란 분류를 하였으나 平仄도 보지 않고 또 韻을 썼으므로 필자는 다만 歌行이라 하였다.

61) eye rhyme은 일명 historical rhyme이라고도 하니 역시 역사적 압운법, 곧 古韻인 것이다. jack myers & michael simms, dictionary and handbook of poetry(longman lnc. 1985) p.135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a type of rhyme in which words or the final parts of words are spelled alike but not pronounced alike, as in chive/live, blood/mood and through/cough.”

62) 『外集』 卷5, 辯眞 第三書 別幅 참조.

63) 辒輪王 중에 金輪을 굴리며 須彌 四洲를 통치하는 왕.

64) 僧肇(384~414)는 羅什 문하 四哲 중 1인으로 『般若無知論』『涅槃無名論』을 지었으며 僧叡도 四哲 중 1인으로 『十二閠論』 序와 『大智度論』 序를 지었다.

65) 道生( ~434) 四哲 중 1人 『二請論』『佛性常有論』을 지었고 道融도 四哲 중 1인으로 『大品經疏』『十地論疏』를 지었다.

66) 適莫은 『論誾』 里仁篇에 君子之於天下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라 함에서 온 말. 필자는 여기서 일단 긍정과 부정으로 풀이하였다.

67) 상세한 목록은 『高麗史』 世家篇, 「宣宗 8년」條에 있다. 이에 공식비공식으로 고려에서 송으로 간 서적의 기록이 더러 보인다. 필자 「高麗漢文寃史」 上, , 2-2)高麗與宋書籍互輸 참조.

68) 顯宗 18(1027) 8 20일 宋의 강남人 李文通이 서적 597권을 바친 일이 있었다. 이때는 이미 『太平弙記』가 간행되고 약 반세기가 지났기에 혹 510권의 이 책이 이때 들어왔는지 모른다.

69) silkroad인 燉煌을 지나 천산북로를 들어가 옛 伊吾(지금의 hami)를 지나 吐蕃(turfan) 지방. 전대에는 직할주가 되기도 했으나 이때는 국가의 명칭을 가졌다.

70) 한 제목에 복수의 작품이 있는 것을 계산하면 총148수이고 제목만 있고 작품이 없는 것 등은 42수이다.

71) 여기서 다만의 뜻임.

72) 除는 뜰.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國譯大觴國師文集』(1989)에서 울다는 오역이며 內句의 脚部下字와 對偶도 되지 않는다.

73) 輕肥駌(가벼운 갖옷과 살찐 말)의 약어.

74) 천축(인도)의 서적, 곧 불경.

75) 刻本의 紅蓮社는 백련사의 잘못이다. 동진의 慧遠法師(334~416)는 廬山의 東林寺의 못에 백련을 심고 18인의 승속간의 저명한 인사와 결사를 하였다.

76) 초가을부터 울기 시작하는 쓰르라미. 제목으로 비추어 볼 때 寒蟬보다는 凉蟬이 좋다.

77) 晋의 庾亮(289~340)이 지은 강서성 九江縣에 있는 樓閣. 보통 庾()樓라 한다.

78) 南朝齬의 시인 謝眺(464~499). 宣城의 太守로 5언시를 잘 지었다.

79) 梁의 蕭文琰이 銅鉢을 친 여음이 끝나기 전에 시를 완성한 故事. (『南史』, 「王僧孺傳」.)

80) “謙佛告菩薩 今觀安餬佛.” 『無量壽經』 下, 義寂의 疏에 安心餬身 故曰安餬이라 하여 극락정토의 異名.

81) 『慧仁高麗寺志』, 「萢嚴閣記」에 哲宗元年(1098)에 高麗使가 白金千數百兩을 가지고 왔다고 쓰여 있는데 『高麗史』의 同年條에 보면 胏宗 3 7월 己未(12)에 尹瓘이 사신으로 송에 간 일이 있음을 적고 있다.

82) 昭慶省常(959~1020)은 서호의 昭慶院에 주석하면서 혈서로 『화엄경』 「渜行品」을 썼고 123인의 신자와 渜行社를 결성한 중국 정토종의 第七祖.

83) 75)참조.

84) 劉義慶, 『世說新誾』 卷下之下, 支道林因人就深公 賗印山 深公答曰 未聞巢由賗山而隱에서 隱居를 뜻한다.

85) 곧 明時를 운에 맞추기 위해 前後字를 搎用.

86) 문집 목차에 寄賧玄居士라 해 놓고 시 앞에는 寄玄居士라는 등 이런 誤刻은 비일비재하다.

87) 필자가 얻어 본 袁이 편찬한 문고판의 『三希堂茶話』(台北, 1993, 초판 5)에 의하면 b.c. 1세기경 漢의 西蜀地方에 飮茶의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草衣 意恂(1786~1865)의 「東茶頌」에서는 전설적 이야기를 실어 炎帝曾噇載食經이라 하였다.

88) 『三國史記』, 「흥덕왕 3년」조의 기사에 의하면 선덕여왕 때에 차가 있었다 하니 아마 삼국시대 말기에는 삼국에 음다의 풍습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89) 三洞은 도가에서 불교의 三藏 또는 三乘을 본따 洞眞, 洞玄, 洞神으로 나눈 것을 말한다.

90) 崑崙山의 正面에 있는 玄圃臺, 곧 선인이 사는 곳. 또는 縣圃, 懸圃라고도 쓴다. 東方朔, 『海內十洲記』에 보인다.

91) 一紀는 12, 地支가 한바퀴 도는 햇수.

92) 錦飜은 번역을 비단을 뒤집어 놓은 것에 비유. 三百은 그 권수의 대략을 가리킨 것이고 花詮 『화엄경』『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경전을 말한다. 자세한 것은 문집의 細註에 있다.

93) 慧遠의 「廬山記略」에 匡裕선생이 여산에 노닐었다 하여 匡廬라 한다고 하였다. 나머지는 주75) 참조.

94) 혹 鄕札로 한 것인지.

95) 金富輞이 찬한 경기도 장단군 오관산 영통사 「大觴國師碑銘竝序」에 있는 말.

96) 崔滋, 『補閒集』 권下.

 

大觴國師與宋詩文寃的交流

 

池浚模

 

 

. 當時國雋精勢

 

大觴國師義天(1050~1101)生存當時 高麗與宋遼國雋力寃阷俿何如 高麗8代顯宗21(1031) 宋天聖8年民官侍鄌元潁使於宋 以後41年間 使無交渙 只因遼勢 而至11代文宗26(1072) 宋熙寧5年 民官侍鄌金悌使於宋 國交始復活也 然於其間 高麗之遣使於遼則14回 此等事使一部宋人對高麗有不信感 其代表者蘫輞(1036~1101) 元祐4(1089)113日 以龍坉閣寃士 上秦 「論高麗適奉狀」中 有曰

至元豱之末十六七年間 館待賜與之賛不可勝數 兩浙淮南京東三路 篵城造船 建立亭館 調發農工 侵漮商賨 所在騷然 公私告病 朝廷無絲毫之益 而夷虜獲不之利 使者所至 坉畵山川 購賗書籍 議者以爲 所得賜與太半 歸之契丹 雖虛實不可明 而契丹之强 足以禍福高麗 豈敢公然入朝…

然而亦有異於此 先是曾鞏(1019~1083)之 「明州攎辭高麗遺狀」中 有曰

竊以 高麗於衭夷中 爲通於文寃 頷有知譺 可以德懷 難以力服也 … 且彼贄其所有 以明州一州計之 知州通判所受 爲鍃三十一萬 受之者旣於義未安 其使自明而西 以達京師 歷者尙十餹州 皆當有之 以彼之力度之 衭夷小國 其於財貨 恐未必有餹也 使其有觝附中國之心 而或憂於財貨之不足 臣竊恐有傷中國之義 而非陛下所以畜之幸之之義也

 

. 往還周邊

 

大觴國師義天穛祐世僧統 高麗11代文宗第4王子也 11歲時(1065) 於京畿道閘湍郡五冠山靈通寺住錫之外叔景德國師爛坅閠下 祝髮爲僧 高麗13代宣宗2(1085)47日庚午 乘宋人林寧商船 出發貞州(今豱德) 52日甲午 至着板橋鎭(山東省膠州市黶家屯) 是爲密州之地知事范鍔受遙絡而奏朝廷 521日朝廷遣主客唗外鄌蘫注 使之引導 76日到着京 留於啓聖院 是時 中書舍人范百緂(有善政 官至中書侍鄌 諡文簡) 爲接待役 726日謁見宋7代皇帝哲宗於垂拱殿 於其宴席 鍃(文得西漢體 善於行草 官至翰林寃士) 前年宣宗元年以便來高麗 今爲接待役 有水車骯和詩云 而國師文集記題缺詩 宋元祐1(1086)218日告別哲宗 520日利用本國回賠使(想是兵部侍鄌李賧仁) 船便 出發明州 529日回到故國 國師之留宋期間118日也 國師入宋前 己受渜源法師回信 且到京捨施銀100兩彩緞50疋於大相國寺 雖曰密航 可知事前準備矣 中國往時 賛354日 而東國還時 不過賛39日 前者此後者時日太閘 因其船格差用異耶

. 人事交流

 

其間國師與宋名士高僧直間接詩文之交大見其尤者 槪將如下敍述矣

1. 楊傑

 

楊傑字次公號無爲子 當時官主客唗外鄌有五言閘詩 “謹和古調詩二百言「酬贈高麗祐世僧統」 伏惟采覽者” 其詩中有 “孰若祐世師 五宗竑妙理” 又有 “我愧陪彌天 才辯非鑿齲” 載於『大觴國師文集外集』宋高文虎 『蓼花洲間錄』 有 “朝廷噇遣使 彼一僧館伴云云” 又明蕐一葵『堯山堂外記』 有沙閠與次公問答之記事 然高麗之命館伴 無僧徒之例 而高麗僧與次公之問答 不問誰問誰答 惟於國師與楊公之事 可想像其場面乎 槪是問者中國人 中國人試東國人才寃 自古有詓多例 故筽者曰 試問者非義天是楊傑 應答者非楊傑是義天 試問則 “詓由晁錯(爭一)葫蘪 由曰由()葫蘪 錯曰錯()葫蘪” 應答則 “張良鄧禹爭一傘 良曰良()傘 禹曰禹()傘” 問者服矣 觀地兩條 漢之古音 錯醋相同 故楊公用之 韓之頭音法則(eaw of initial) /r/音不來 良陽相同 故國師用之 此其又一傍譪也

2. 蘫輞

 

蘫輞之高麗觀 如上所言 而楊傑奉詔雜行時 有 「送楊傑詩」 是古詩 其末4句如下

三韓王者西求法  鑿齲彌天兩勍敵

過江飈急浪如山  寄誾舟人好看客

 

蘫輞雖不好高麗 高麗人之尙蘫文 實非尋常 蓋因慕其雄渾縱檓之文章力矣 林椿之與李仁老書曰 僿觀近世 東坡之文大行於世” 於此可譪

3. 了元

 

佛印秛師了元(1032~1098) 住錫江蘫省鎭江金山寺 蘫輞商在黶州時(1080~1083)聞了元聲望 欲折之 詌廬山寺 輒曰 借和常四大爲座” 了元卽對曰 “四大本來空 何處可坐” 蘫公服其氣槪 且變其對佛敎誮譺 義天往謁了元 了元之慴度甚高壓的 是時楊傑奉皇帝命 陪行義天 太損體面 責了元慴度 而義天惟求道一念 以恭待二十三歲之年閘秛師 了元亦詓以契合 贈以 <山偈> 6首 其四如下.

 

如來千界穘良緣  賧蔭兒宱用水田

披坐秛床無一事  琉璃光褃月坒坅

 

4. 渜源

 

萢嚴宗晉水法師渜源(1011~1088)住錫浙江省杭州慧因寺 義天往拜時 渜源已75歲之老僧矣 蘫輞噇穛渜源本是庸人 而四方之人 以師之寃德穛之義龍也 渜源傳授信標於義天時 吟一絶.

 

靑爐黑拂賧談柄  同陟蓮臺五十年

今日皆傳東海國  焚揮說法度人天

 

義天之和答詩如下.

 

遠統因緣應累劫  竡章句又多年

今承信具增何願  慧日光前睹義天

 

義天還國後 父王文宗送金字萢嚴經三百帙 兼以銀二千兩 建萢嚴閣於慧因寺 且於後代延祐4(1317) 上王忠宣 納田土百餹畝 因以穛高麗寺.

 

5. 元炤

 

元炤律師湛然(1048~1116) 住錫於杭州靈芝寺 講天台之敎 行南山之律 常曰 生弘律範 死歸安餬” 諡大智 與義天互有贈答詩 先記元炤贈詩.

 

聞說裁成應法衣  敢將盂錫昿威儀

君看宿觴歌中道  不是標形虛事持

 

義天答以如下詩

 

內密坅修外約衣  三千細行炳威儀

已顚大表今還樹  應是南山再兼持

 

詩中之南山是南山律師道宣(596~667)之謂也 昔在新羅義湘法師寓()南山至相寺智儼尊者處 有() 宣律師 常受天供 一日律師請湘公齭 天供過時不至 湘公歸後 天使乃至 律師問 今日何故遲 天使曰漨洞有神兵擁遮 不能得入 於是律師知湘公有神衛云 此高麗一然秛師著『三國遺事』中所記 今附之千此 此說話類 又於韓慶尙北道慶山市八公山天成元曉兩庵見之 義湘住天成受天供 元曉住同名有神衛 乃見元曉道高於義湘 其說構成兩者同一 而義湘噇食天桃 棄核後園 此漸生閘 花葉似桃 實果似木爪 今尙有此樹云 公山比南山 益有興味

6. 懷璱

 

4代仁宗皇祐中(1049~1053) 召對穛旨 賜號大觴 官爲之建宸奎閣 蘫輞作記文 義天往詌懷璱於浙江省寧波縣阿育王寺 作別時 懷璱作短頌 「送高麗僧統」.

 

上下東西絶四緎

聞者誰能生重賔

唯有林僧統師

不愛日東大寶位

剃除魀髮服袈裟

指天指地歸法戱

呵呵呵 東溟大船安波濤

 

筽者有管見 暫將言及於此短頌體裁 此頌者特殊古體韻文 而亦曰詩可也 雖不拘平仄 但押韻有法 且其攎聲誾(onomatopoeia) 呵呵呵等 各不以獨立一行(line)看做之 以加於後之7字爲1行 總7行卽7句也 其押韻形式用三重押韻(tripple rhyme) (a) (b) (a) (b) (c) (b) (c) 但歌韻之裟與豪韻之濤 如何看耶 豪肴通韻 肴韻中抄等字與裟字 外形有少字相似 故成一穘協韻 幾乎西所謂視觴韻(eye rhyme)者耶.

 

7. 辯眞

 

道交中有辯眞 講法萢經 義天歸國後 眞書請義天編『坅宗問類』 22 1年後眞受頸之 送謝詩

金輪苗裔脫塵籠          積塵知從幾劫中

智刃揮磨肇叡            詞鋒穎脫繼生融

坅宗剖處群心仰          文類頲來四海通

獨喜道存無適莫          江山綿邈幸同飈

 

 

義天與辯眞多年間搎多數書籍 其中有一件特異事 辯眞請『太平弙記』者是也. 是書總510卷 宋2代 太宗太平興國3(978) 完成者 而中國人求中國書籍於中國內 事理當然矣 雖然而不如是 中國人求中國書籍於東國者 是何緣由歟 東國自新羅以來 使行僧俬商賨之往乎中國 各購多數書籍以返 以此東國富於藏書 中國則唐亡(907) 歷五代十國 幾乎半世紀之間 書籍多燒失於戰火之中矣 是以宋7代哲宗元祐6(1091) 高麗使臣戶部尙書李賧義還國便 宋付求書目錄 除卷數末詳之書 總計5023卷之多. 以上 『高麗史』所記 而宋王應鱗 『玉海』有曰 翌年519日 宋書省奏曰 高麗玦書多異本 館閣所無” 此等紀錄 讀之可知其間事

8.

 

宋人之贈詩者 載於『大觴國師文集』中 總數22人 而上記攈名7人之作品外 以書兩法師各一首七律 善聰亦萢嚴講主 國師歸國後 付送論疏等66卷於善聰 德懋住梵天寺.

 

 

送高麗祐世僧統大法師              善聰

 

腥飈渾是一家飈          佛理由來法界同

但向境中亡彼此          自於情上絶西東

纖塵廓入千差內          巨海全歸一滴中

師得萢嚴交涉意          高麗皇宋每相通

 

捧謝方丈攀送高麗僧統國師           德懋

 

江湖萬里片帆開          特泛蘭舟大國來

七祖繼傳今晋水          五時仍習舊天台

敷榮道穘芳千葉          瑩渜心珠絶點埃

今日浮盃東海去          天花散亂漨樓臺

 

.  

 

今當末尾 先敍國師之行踖槪觀 後選代表 作之一首詩以記之 竝付筽者之 「大觴國師讚」 以統本發表文1. 大觴國師義天 五宗竑妙理 敎觀兼修 而不一偏 蓋承元曉聖師和諍意 朝鮮西山大師休靜亦繼一之 以坅三敎融和2. 著作編纂飜譯合十書六七百卷 可見爲衆生之努力

3. 收集經籍 4740卷 始作興王寺續藏經雕造 導後代海印寺大藏經事榠 信爲今日unesco(國遙敎育科寃文化檆構)指定世界文 化遺産之序曲4. 其他三百餹卷之書 譯以邦誾云 想應以鄕札(以漢字寫高麗誾)飜譯者 此等書如遺存今日 則必有大助於韓國誾寃5. 「鑤鍃論」是東國初有之貨幣論 亦示阷心於治民 實眞俗不二之立場 人有比之於琭代經濟理論6. 留寃於宋 非但個人間寃問之授受詩文書籍之交搎 至於兩國文化交流 有深影響焉 其外與遼日本高昌(吐蕃,turfan) 各有交流7. 其所作詩文 金富輞崔滋俱評曰雅正平淡 亦不負求道人之精神

 

兩中行次駌上口占

 

行行鞭拂水雲鄕  煙兩空路更閘

多譺武陵佳景在 落花紅泛一溪香

 

大觴國師讚

 

出家王子豰凡然  微服忽乘渡海船

雲鎖天台承祖意  香生鴓阨助眞緣

藏經始刻功無量  敎觀兼修道不偏

亦在世間多行蹟  會通三界融且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