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眼宗飈을
계승한 高麗
智宗 그 시대의 秛思想
崔錫煥(月刊
『秛文化』 發行人)
1.
序論
달마(達摩․?~528)가
印度로부터
건너와 中國
땅에 秛의
씨앗을 뿌린 時期는
대략 梁나라
때였다. 秛宗은
老莊思想을
뛰어넘어 中國思想의
精神的
基眕을 이뤘다.
이를 일러 達摩秛宗이라고
말하는데,
2祖 慧可
- 3祖 僧璨
- 4祖 道信을
거쳐 5祖
弘忍에 의해 秛宗의
기틀을 잡았고 그의 閠下에
의해 南宗과
北宗,
渜衆宗이
갈라져 비로소 秛寃의
黶金時代를
맞이했다.
7世紀에
접어들어 秛宗이
中國大陸을
席卷하게
되자 당시 中國
秛宗界에서는 秛法이
東쪽으로
흘러가는 讖說이
전해졌다.
그 시기 西堂智藏,
麻谷寶徹,
雲居道膺 등이
新羅人을
大攈 印可함으로써
그들 秛師에
의해 東流之說을
實琭하기에
이르렀다.
『景德傳燈錄』에는
新羅로
돌아온 사람이 21名,
唐에
머문 者가
5名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新羅
崔致遠
(857~?)이 지은 「鴓巖寺智譪大師寂照塔碑」는
新羅에서
入唐한
求法僧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唐土에서
行化를
펼친 秛僧으로는
西化則,
靜衆無相,
常山慧觴,
益州金,
鎭州金이
그들이다.
그처럼
入唐
求法僧들이 中國大陸을
席卷했었던
模樣이다.
오늘에도 당당히 中國佛敎에
彗星과
같은 별들이 많다.
그중에서
3年
전에 밝혀진 中國5百羅漢의
班列에
오른 無相空尊者가
있다. 金和尙으로
널리 알려진 無相을
말하는데 그는 唐
玄宗의 積榦的
支持를 얻었고 四川省에서
渜衆宗을
열어 秛宗의
祖師에
班列에
오른 분이다.
또
한 분은 우리들에게 金喬觴으로
널리 알려진 地藏法師(696~994)로
中國
安徽省 九萢山에서 修行
끝에 地藏菩薩의
化身으로
中國佛敎의
民衆들이
떠받드는 無佛時代의
메시아이다.
또 한 분은 中國에
들어가 玄奬法師의
首弟子로
唯譺寃의
大家인
坅測法師
(613~696)를 말한다.
이들
3人의
共通點은
秛,
敎寃,
修行을
통해 中國
佛敎의 살아있는 聖人으로
받들어 지고 있는 人物들이다.
이들은
中國에
歸化한
秛僧으로
新羅로
돌아오지 않고 唐土에서
秛飈을
드높인 秛僧들이다.
그처럼 中國大陸에
이름을 떨친 秛僧들은
소위 ‘東流之說’을
實琭했던
人物들이었다.
唐末에
접어들면서 中國의
秛宗은
五家七宗의
分立時代를
맞아 六祖
慧能 以後에 分派되어
臨濟,
潙仰,
曹洞,
雲閠,
法眼으로
5個의
流派로
兩分되고
여기에 臨濟宗의
黶龍派와
楊崎派로
分派되면서
5家
7宗의
時代를
맞는다. 5家
7宗 중
맨 마지막에 法眼文益秛師
(885~958)가 南京
淸凉寺에 터전을 잡고 浙江,
江蘫省을
中心으로
秛閠을
이룬 法眼宗은
文益
-> 天台德韶
-> 永明延壽를
中心으로
秛敎一致의
宗旨를
들어 宋
中期까지 가장 秛飈을
繁盛하였고
그 秛飈은
도도히 물결처럼 百年間
이어졌다.
특히
法眼宗은
高麗 光宗의
歸依를
받은 智宗등
36人의
高麗僧을
永明延壽秛師에게
보내 得法케
했다.
때마침
11月
10日부터
12日까지
中國 杭州의
삼태산장에서 第
2期
吳越佛敎와 社會寃術討論會를
開催한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法眼宗飈을
繼承한
高麗 智宗과
그 時代
秛思想을 發表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永明延壽秛師
誵辰 1100周年을
맞아 永明延壽의
三敎合一
思想을 밝히는 좋은 檆會에
永明延壽秛師에게
印可받고
돌아가는 智宗秛師가
高麗에
法眼宗飈을
연 來歷을
자세히 밝히고자 한다.
2.
中國에
天台宗
復活시킨 高麗의
謆觀과
義通은
누구인가.
韓․中
두 나라의 友好阷俿는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中國佛敎協會閘이신
一誠秛師가
밝힌 바와 같이 韓․中
두 나라 友好阷俿는
公元
4世紀 初부터
始作하여
14世紀
末까지 이어져 왔고 中國에서
求法한
秛僧만도
265名에
이르니 渜慧和尙이
2001年
10月
21日 中國
栢林秛寺에 韓國의
佛敎春秋社가
發議하여
共同建立한
「韓中友誼趙州古佛秛茶紀念碑」
除幕式에서 한 秛誾가
되살아난다.
“韓國과
中國은
한 뿌리이니 예로부터 한 집안이며 秛脈과
法脈 또한
서로 전함이다.〔韓中蓮體
千古休戚 秛飈與共 法脈相襲〕”라고
感激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法眼宗은
臨濟宗과
더불어 高麗時代에
널리 流行했던
宗派로
高麗 光宗의
절대적 支持를
받은 智宗,
釋超,
寂然,
慧炬 등
주로 敎寃僧들이
주도해 갔다.
新羅나
後百濟의
적극적인 懷柔策에도
불구하고 秛宗이
合心하여
太祖의
統一帝國建詏에
적극적 聲援을
보낸다. 그것은
뒤에 王建이
高麗를
建國한
뒤 보여준 秛宗의
保護에서도
드러난다.
太祖가
後三國을
統一한
다음해인 937年부터
10年
동안에 그의 勅命으로
建立한
塔碑가
무려 13個에
달하니 太祖가
얼마나 秛宗의
승려를 外護했는지
斟酌하게
한다.
高麗
建國에 절대적 影響을
끼친 秛宗은
光宗代에
이르러 秛宗勢力을
점차 王室과
遊離되게
하려고 한다.
그 대신 敎宗界의
宗派가
서서히 秛宗界를
掌握하기에
이른다. 萢嚴宗
出身의 僧俬인
法印國師
坦文이 光宗의
國師가
됨으로써 敎宗의
復活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 光宗은
智宗 등
36人의
敎寃僧을
選拔하여
宋나라로
留寃 보내기에
이른다.
光宗이
智宗 등
36人을
選拔하기
以前 이미
光宗은
天台宗
復活을 생각했었던 것 같다.
天台와
法眼의
만남은 光宗이
追求해
온 秛敎一致의
만남이었다.
光宗의
命을
받은 天台宗
僧俬인 謙觀과
寶雲義通은
吳越國에
派遣된다.
謙觀과
義通이
吳越國을
찾았을 때 吳越國은
唐나라가
滅亡한
뒤 混亂期에
접어들었고 佛敎는
전반적으로 沈滯되어
敎寃에
관련된 책까지 없어져 吳越國은
最惡의
狀慴에
빠져있었다.
이때 鍃塘(절강성
항주)에서
鍃熊가
建國한
吳越에서는
佛敎를
隆盛시키는데
힘썼으며 이로써 吳越과
高麗 사이에
活潑하게
交流가
이루어졌다.
하루는 吳越王
鍃澁이 永嘉玄觴스님의
『秛宗永嘉集』을
읽다가 解釋되지
않는 句節이
있어 여러 僧俬들에게
물어봤으나 對答하는
이가 없었다.
그때 한 僧俬가
鍃澁에게
말하였다.
“그것은
天台智者大師의
『法萢經玄義』에
나오는 句節로
지금은 敎籍이
모두 없어져 잘 알 수 없으나 高麗에는
그 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吳越王
鍃澁은 高麗에
使臣을
보내어 天台寃
書籍을 구해오도록 했다.
光宗은
吳越王의
請을
받아 들어 謙觀을
시켜 高麗에
있던 書籍들을
가지고 吳越에
가게 했다.
謙觀이
王命을
받고 吳越에
到着한
時期는
961年이었다.
謙觀은
義寂 閠下에서
10여
年 동안
머물면서 天台寃을
硏究했고
『天台四敎儀』를
著述하기에
이른다.
謙觀이
吳越로
갈 때 高麗에서
가져간 天台寃
阷聯書籍들은 뒷날 中國에
天台宗이
復興하는
契檆가
된다. 『天台四敎儀』는
동아시아 佛敎圈에
큰 影響을
끼쳐 註釋書만
73鎟에
이르니 그의 눈부신 活躶은
高麗 佛敎의
떠오르는 별로 推仰받았다.
謙觀의
뒤를 이어 普雲義通(927~988)이
있으니 그는 7年
뒤인
947年에
吳越로
건너가 義寂閠下에서
天台寃을
修寃하고
그의 뒤를 이어 中國
天台宗의
16代
祖師가 된다.
지금도 天台山
智者塔院 壁面에 中國
天台宗의
16代
祖師로 당당히 모시고 있으니
그의 思想이
吳越을
뒤덮고 있었음을 譪明한다.
뒤에 그의 行蹟을
높이 評價하여
宋으로부터
寶雲이라는
號를
받아 그의 이름을 宋나라에
드높였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天台宗의
正統派인
山家派를
形成,
뒷날 中國
天台宗 中興의 鼻祖라는
穛頌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光宗이
죽은 뒤 光宗의
後援을
받았던 謙觀과
義通은
歸國하지
못하고 中國에서
一生을
마쳤다. 新羅의
無相,
地藏,
坅測 등과
함께 中國의
歸化僧으로
남게 되었다.
그 때문에 高麗에
天台宗이
더디게 發展되었는지
모른다. 사실
高麗에
天台宗은
大觴國師
義天에 의해서 開創되었다.
大觴國師
義天(1055~1101)은
高麗 文宗의
네 번째 아들로 1085年
4月 宋으로
留寃길에
올라 山東省
密州의 板橋鎭을
거쳐 宋나라
首都 邊境에
到着한
뒤 宋의
哲宗에게
渜源閠下에
머물 것을 詓諾받아
그로부터 萢嚴寃을
배운다. 그는
高麗에서
가져간 7千5百여
帙의
佛敎書籍들을
慧因院에
提供한다.
義天은
中國
天台宗의
19代祖인
從謌에게
天台寃을
배운 뒤 1097年에
歸國
天台宗을 開創함으로써
하나의 宗派로
成立된다.
그 뿐만 아니었다.
浙江省
杭州에는 坅光法師를
비롯 梵日國師
등이 해창 鹽官院에서
齬安秛師로부터,
印可를
받은 뒤 新羅로
들어가 九山秛閠
중의 하나인 崛※山寺派를
形成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浙江省은
唐末부터
高麗末期까지
수많은 求法僧이
거쳐 갔다.
그 중에서 우리의 注目을
받는 이가 智宗秛師였다.
高麗의
光宗은
高麗의
젊고 覇氣에
찬 36名의
僧俬를
선발, 延壽閠下에
보내어서 法眼宗의
가르침을 이어오게 했다.
그때가
950年경이었다.
3.
高麗 光宗(925~975)의
歸依 받으며
智宗 등
36人
高麗僧 得法하다.
李能和의
『朝鮮佛敎通史』에
“高麗에
한때 法眼宗이
널리 弘布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法眼宗의
開創者는
文益秛師(885~958)로
晩年에
金陵(현남경)의
靑凉院에
駐錫하면서
秛敎雙修를
竝行했었다.
그의 法을
天台德韶(891∼972)와
永明延壽(904~975)가
이어 더욱 크게 發展시켜
秛宗과
敎宗의
回通을
시켜나갔다.
특히 法眼宗은
南宗
頳悟秛을 중심으로 한 臨濟,
潙仰,
曹洞,
雲閠宗에
비해 秛敎一致의
宗旨를
提唱한
宗派로
宋初를
거쳐 宋中代까지
거의 100年間
遵奉을 높이 들어보였다.
法眼宗이
高麗에
盛行하게
된 契檆는
高麗 光宗의
적극적인 法眼秛
導入에서 비롯된다.
光宗은
南宗
頳悟秛보다 秛敎雙修를
좋아한 터라 당시 吳越國에
法眼宗이
널리 流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찍이 光宗은
『宗鐁錄』과
『萬善東歸集』같은
延壽의
著述에
크게 感銘을
받아 宋과
交流를
생각해 왔었다.
때마침 吳越國의
王 鍃澁이
高麗에
使臣을
派遣,
天台宗과
관련된 書籍을
구해 오도록 했었다.
이에 高麗
光宗은 高麗의
젊은 僧俬
36名을
選拔,
延壽의
閠下에서
修寃하게
했다. 光宗
19年 吳越國에서
高麗의
惠居國師가
法眼宗飈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光宗은
惠居를
歸國하게
하여 高麗에
法眼宗을
열었다. 惠居를
道峰山
寧國寺에 駐錫케하고
秛飈을
이어가게 했다.
坉表를
통해 光宗代의
法眼宗
系統의 高麗
僧俬들의 面面을
살펴보면 아래의 <表1>과
같다.
光宗代의
法眼宗
僧俬들의 눈부신 活躶을
坉表를
통해 把握할
수가 있었다.
光宗은
36人을
永明延壽에게
委託,
敎育 했을
정도로 法眼宗의
高麗 導入에
적지 않은 寄與를
했다. 그
중에서 高麗
僧俬로서 歸國한
사람은 道峯慧炬,
寂然,
英俊,
眞觀,
釋超,
智宗 등이다.
이들은
高麗初
法眼宗 成立에 많은 寄與를
한 人物들이다.
智宗은
11年間
中國에 머물다가 光宗
21年(970)
歸國하면서
法眼宗의
核心 思想인
秛敎一致
思想의 體系를
構篵하게
된다. 그
시기 萢嚴宗
僧俬인 坦文
(900~975)이 王師로,
惠居가
國師로
封해졌다.
당시
南宗秛의
頳悟秛과
法眼宗의
秛敎一致論이
對立되어
오다가 光宗
19年에
坦文과
惠居를
王師와
國師로
모시고 智宗이
歸國하면서
비로소 高麗에
法眼宗이
弘布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高麗에
法眼宗을
일으키는데 적지 않은 寄與를
해온 智宗에
대한 傳記는
「原州居頳寺園空國師勝妙塔碑」에
자세히 전한다.
智宗의
字는
神則으로
俗姓은
李氏이며
全州사람이다.
그는
8歲
때 사나사舍那寺
法僧 弘梵三藏에게 가서 削髮하고
出家한다.
그 뒤 靈通寺
琉璃戒壇에 나아가 具足戒를
받은 후 琉璃와
같이 戒行을
淸渜하게
닦아나갔다.智宗더
넓은 世界로
나아가 佛法을
닦고자 현덕(顯德)
2年(959)에
光宗에게
친히 아뢰어 詓諾을
받은 뒤, 그해
中國 吳越땅을
밟는다.
智宗은
바다를 가로 질러 吳越에
到着한
뒤 당시 이름 높은 延壽秛師가
駐錫했던
渜慈寺(당시는
慧日永明院)를
찾는다. 慧日永明院은
954년
吳越國의
鍃弘叔이
建立했는데,
開創 당시에
法眼文益
(885~958)의 梯子인
永明道潛(?~961)이
一代 住持를
맡는다. 그
뒤를 이어 永明延壽가
住持가
되면서 이 절은 法眼宗의
中心道場으로
크게 繁盛한다.
慧日永明院은
현재 渜慈寺이다.
智宗은
959年
慧日永明院으로 延壽를
찾아간다.
智宗과
延壽가
첫 對面하자
먼저 延壽가
묻는다.
“그대는
法을
위해서 왔는가,
아니면 일〔事〕을
위해서 왔는가.”
智宗이
答한다.
“法을
위해서 왔소이다.”
延壽秛師가
다시 말한다.
“어찌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는가.”
智宗스님이
재차 對答하기를
“이에
모래수와 같이 많은 世界에
가득하면 여기까지 찾아온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라
하였다.
이때
延壽秛師가
반가워하는 마음으로 눈〔目〕을
크게 뜨고 마치 황두(黶頭
․
잘 싸우는 새)를
만난 것과 같이 특별히 優待한
뒤 智宗에게
心印을
전해 주었다.
〔吳越國先謁永明寺壽秛師壽問日爲法來耶爲事來耶師法來日法無有二而遍沙界何勞過海來到這褃日旣遍沙界何妨過來壽公豁開靑眼優待黶頭便解髺珠卽傳心印故得〕
그
뒤 智宗은
天台山
國淸寺에 가서 天台宗
15代祖인
義寂秛師를
拜謁하고
서로 뜻이 糾合하여
天台敎旨를
傳受받았다.
智宗은
開寶 元年(968年)에
僧統 贊宇의
請에
의해 傳敎院에서
『大定慧論』과
『法萢經』을
講義하자
수많은 善男善女들이
그의 가르침에 歸依하였다.
智宗은
宋에서
法眼宗飈을
널리 宣損하다가
宋에
머문지 11年
만인 光宗
21年(970)에
高麗로
歸國하게
된다. 光宗은
그에게 鴉摩羅什이
秦나라로
가고, 摩騰法師가
漢나라에
들어온 것과 같이 극진히 맞이했다.
智宗이
歸國하자
비로소 高麗
땅에 法眼宗의
秛敎一致
思想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4.
高麗에서
法眼宗의
復興
光宗
代에 이르러 가장 큰 問題點으로
指摘된
것이 光宗의
敎宗
擁護論이다.
그 時期
마음 한번 잘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修心成佛〕思想인
秛宗은
王室과
멀어져 갔고,
그 代身
王權과 密着되어
갔던 敎宗의
登場으로
光宗代에는
敎宗과
秛宗이
對立하였고,
그 統果
일대 波瀾이
일어나게 된다.
光宗代에
이르러 高麗가
豪族聯合政權勢力을
沒落시키고
中央集權政權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辒搎點에
와 있었다.
그래서 光宗代에
創建한
歸法寺를
中心으로
敎宗 中心으로
뭉치려 했다.
그러나 더욱 갑작스런 變化를
追求했던
光宗의
改革이
그를 反對하는
保守派
勢力에 의해 否定되면서
그가 受容하고자
했던 法眼宗이
高麗 땅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光宗이
追求했던
改革意志와
法眼宗
開創意志가 그대로 사라진
것만은 아니었다.
뒷날 義天(1055~1101)에
의해 天台宗으로
吸收,
統合되는
등 法眼秛의
思想的 물줄기가
도도히 흘러왔다.
義天이
天台宗을
開創했을
때 參與한
사람이 光宗代에
中國으로
留寃가서
延壽에게
法眼宗을
배워온 法宱들이었다.
義天이
宋나라에서
歸國하자마자
智宗의
塔을
찾아 祭祀를
지낸 것 또한 無阷하지
않다.
당시
『宗鐁錄』이
高麗에
流行된
까닭도 사실 智宗이
中國에서
求法할
時期로
내다본다.
『宗鐁錄』은
延壽가
弙順
2年(952)
奉化
雪竇寺에 住持로
있을 때 草稿를
썼다. 그
뒤 宋나라
建隆 元年(960)에
吳越國의
鍃弘叔이
杭州
靈隱寺를 修建하고
그를 住持로
請하였다.
이듬해
다시 杭州
永明院(琭
渜慈寺)에
그를 모셨는데,
『宗鐁錄』은
그때 修整作榠을
끝마쳤다.
따라서 韓國에
『宗鐁錄』이
傳播된
時期 또한
961年에서
970年경
사이로 推定된다.
그 時期가
智宗이
中國에서
求法할
時期이므로
970年
智宗이 歸國할
때 『宗鐁錄』을
筽寫하여
携帶했을
可能性이
매우 크다고 보고 있다.
그처럼 法眼宗이
高麗에
꽃 피울 時期
光宗의 法眼宗을
受容하려는
急適的
意志에 따라 消滅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中國과
韓國에서
같은 時期
胎動 되었다가 다시 사라져
버린 法眼宗은
法眼文益에
의해 秛敎
一致의 思想을
展開,
宋과
高麗의
思想을
이어준 징검다리였다.
以上
光宗代에 形成된
法眼宗의
思想을 살펴보았는데,
高麗 後期에
天台宗이 開創되면서
法眼宗을
吸收,
統合하였고,
같은 時期
曹溪秛宗인 懶翁의
秛思想과 법안선이 만나면서 비로소
高麗 後期의 秛宗은
法眼秛을
加味시킨
天台宗이 등장하게
된다. 그
原流인 法眼秛 思想이
1百年間이어져
宋과 高麗를
思想的으로 이끌었던
精神的 根幹이 되었던
까닭이다.